< 15화 >
다음날 점심. 이현우와 은설은 회사 근처 파스타집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메뉴를 주문한다. 은설은 알리 올리오. 현우는 토마토 미트스파게티. 메뉴가 나오자 말없이 식사가 이어진다.
현우는 문득 예전에 썸녀나 여자친구와 했던 식사를 떠올린다. 현우가 존잘이었다면 여자들은 한 두마디만 해도 꺄르륵 배를 잡고 웃거나 먼저 대화를 주도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평범남이었다.
‘분위기가 싸하지 않게 많이도 떠들어야 했지.’
과거를 회상하면 쓴웃음을 짓는 현우. 사실 그는 밥 먹으면서 대화를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야기가 끊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이 마음이 편했다. 은설처럼 매력있는 여성과 단 둘이 식사하는 자리지만 그에게는 아쉬움이 없었다. 아쉬운 사람은 은설이다.
- 달그락 달그락
포크와 수저가 움직이는 소리만 둘 사이에 울린다. 그리고 더 이상의 침묵을 참지 못하겠는지 은설이 먼저 입을 뗀다.
“이대리님 식사는 괜찮으세요?”
“네 맛있네요.”
“그때는 업무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어요. 경영지원팀에 매번 신세만 지네요.”
“아 네.”
다시 정적.
‘뭐야 진짜. 애써 이야기 했는데’
은설 자신도 처음 겪어보는 싸한 분위기. 데이트할때면 항상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남자들이었다. 단 둘이 식사하는데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는 이현우.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이상형과 거리가 먼 이현우. 식사매너도 형편없고, 최악의 식사였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이현우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상한 감각이 은설을 감싼다.
‘근데 왜 이런거야 도대체’
“...”
“...”
“혹시... 이대리님은 사귀는 분이 있으신가요?”
“네? 은 대리님 그건 너무 사적인 질문 아니신가요?”
이현우의 까칠한 대답에 아차 한 은설. 대화를 먼저 주도해본 경험이 없다보니 악수 끝에 무리수를 두고 만다. 민망함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아. 죄송해요. 별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네 지금은 따로 없네요. 은 대리님은요?”
“아 저도 지금은 없어요. 아 혹시... 정말 그냥 별 의미 없는데 혹시 이대리님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퉁명스러운 현우의 대답에 자꾸 매달리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가는 은설. 항상 남자들에게 짜증날 정도로 듣던 질문을 자신이 이제 하게 될 줄이야.
“스타일요? 흠... 요새는 서진아 사원? 그분이 참 매력적이더라구요.”
“그 이병주 대리님과 사내부부인 회계팀 서진아씨요?”
“네.”
최근 다른 직원들과 거의 사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은설도 알 정도로 요즘 서진아 이야기는 회사에서 이슈였다. 결혼 후에 몇 개월 만에 갑자기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출근한 그녀. 그 수위가 상상을 초월한 탓이었다.
“그... 요즘 너무 노출이 많은 거 같은데”
“아 그래요? 전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더라구요. 몸매도 좋으시고.”
‘천박해... 창녀도 아니고 그런 게 좋다고?’
자신도 몸매를 드러내는 하이웨스트 스커트를 자주 입긴 하지만 서진아의 최근 홀복 스타일은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저렴한 옷차림이다. 창녀도 아니고. 그런 서진아의 스타일이 좋다는 현우의 말에 실망을 넘어 천박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큭큭 한번 막 나가 볼까’
“진아씨에 비해 은 대리님은 음... 볼륨감이 부족한 거 같은데요.”
“뭐...뭐라구욧!”
위아래로 자신을 훑으며 대놓고 비교하는 현우의 말에 은설은 소리를 빽 지른다. 당장에 성희롱으로 신고하려던 그녀는 갑자기 서진아 몸매에 비해 자신이 부족하다는 현우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다.
“이 대리님 그거 다 뽕이에요 아시겠어요? 흥! 남자들은 참 그런 걸 모르더라.”
‘엥? 서진아 몸매 찐인데...’
“아 그래요? 그래도 음... 은 대리님에 비하면 몸매는 좋으시던데...”
계속 자신의 몸을 훑으며 비웃는 현우의 말에
“참나. 어이없어서 정말. 그...그럼 주말에 한번 봐요. 제가 사복을 입을테니까. 그럼 서진아씨와는 비교도 안될꺼에요.”
“네? 그거 지금 데이트 신청이신가요?”
“뭐라구요? 아니아니요. 그냥 이 대리님의 착각을 바로잡는 것 뿐이거든요? 데이트는 무슨.”
“네에 네네. 알겠습니다. 점심시간도 끝나가는 데 슬슬 일어나시죠.”
“하아...”
현우의 성의없는 대답에 갑자기 자신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후회가 밀려오는 은설. 뱉은 말을 취소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러기에는 현우의 말처럼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해버린 꼴에 자존심이 상한다.
‘큭큭큭 월척이네’
완전히 현우의 페이스에 낚여버린 은설이었다.
* * *
토요일 오후. 회사 근처 가까운 시내 카페에서 은설은 커피를 마시며 이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설마 지금 약속시간에 늦는 거야?’
2시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현우는 2시20분이 넘어도 깜깜무소식이다. 자신이 바람맞힌 적은 있어도 20분이나 넘게 기다린 적이 있었던가? 시종일관 관심없는 이현우의 태도에 끌려다니는 자신에 화가 나는 은설이었다.
그럼에도 약속시간에도 늦는 현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간다. 그 감정은 자존심과 짜증을 억누르며 은설을 카페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
- 잘근잘근
덕분에 애꿎은 빨대만 마구 씹어대는 은설.
- 딸랑
2시30분. 정확히 약속시간에서 30분에 드디어 이현우가 카페에 모습을 드러낸다.
‘큭큭 화 좀 났으려나?’
그녀의 심리상태를 업무시스템으로 낱낱이 볼 수 있다는 자신감 덕분일까? 현우는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은설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대리님 편안한 복장으로 나오셨네요?”
트레이닝복과 슬리퍼, 푹 눌러쓴 모자까지 현우의 모습은 은설이 데이트에서 한번도 보지 못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머리는... 감았겟지?’
자다가 그대로 나온듯한 현우의 모습에 8시부터 화장을 하고 헤어셋팅을 한 은설은 카페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오호’
8시부터 준비한 노력의 결과인 듯 회사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긴 속눈썹을 한껏 풍성하게 올리고 눈화장을 조금 진하게 한 듯 고양이처럼 또렷한 눈매, 갈색의 단발머리를 고데기로 정성스럽게 셋팅해 자연스럼게 떨어지는 웨이브가 세련된 은설의 얼굴과 잘 어울렸다.
현우가 서진아와 비교해서인지 의상도 꽤나 노출이 있는 옷을 입었다.
높은 웨지힐은 길쭉한 그녀의 각선미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고, 허벅지를 절반이상 노출하는 하늘색 테니스 스커트는 속옷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상의는 딱 붙는 흰색 크롭티를 입었는데 얇은 허리와 탄탄한 복근 그리고 수줍게 보이는 타원형의 배꼽.
‘확실히 각선미와 허리-골반라인은 서진아보다 낫네.’
허리부분은 꽉 조이고 골반부터는 넓어지는 테니스트커트 때분에 갸녀린 허리와 풍만한 골반이 더욱 도드라진다. 168의 큰 키에서 나오는 길쭉한 다리와 필라테스도 다져진 탄탄한 허벅지와 얇은 발목
‘가슴이 서진아에 비해 부족하기는 하지만 회사에 이만한 슬랜더가 있을까?’
“흠..흠흠”
자리에 앉자마자 대놓고 은설의 몸을 훑은 탓일까?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그녀가 헛기침을 한다.
“이..이 정도면 제가 서진아씨와는 비교될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아시겠죠?”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은설은 말을 더듬는다.
“음....뭐 확실히 음.... 괜찮네요 몸매가.”
품평하듯 내뱉은 이현우의 말에 화가 난 은설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몸매에 대한 칭찬에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역시...”
“네? 또 뭔데요?”
“은 대리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제가 보정속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알 수 없지 않나요?”
“전 그런 거 안 입어욧!!”
자존감도 없는 여자들이 입는 뽕을 들먹이는 현우의 말에 은설은 빽하고 소리를 지른다. 타고난 몸매도 어느정도 있겠지만 식단관리와 꾸준한 운동으로 가꾼 몸매를 뽕 따위로 치부하다니. 이현우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은설이었다.
“좋..좋아요. 그럼 확인해보면 되잖아요?”
“풋”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은설 때문에 웃음이 터져버린 현우였다. 업무시스템으로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열망]을 강화한 덕분에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현우도 고작 서진아의 몸매를 핑계로 질투심을 유발해 은설에게 저런 이야기를 들을 줄을 몰랐다.
‘아마도 고고한 자존심 때문이겠지.’
이상형이 서진아 같은 스타일임을 어필하고 외모 평가로 은설의 자존심을 살살 긁는다. 평소 꾸준한 관리고 자부심을 같던 그녀는 업무시스템의 [열망] 증폭으로 자신이 현우에게 서진아와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최고의 여자로 보여지길 원했겠지.
‘은설 공략에는 저 자존감을 잘 이용해야겠어.’
“여기선 좀 그렇고... 음 저기 어때요?”
현우는 지난번 밤새 서진아와 질펀한 정사를 즐겼던 낡은 모텔을 가르켰다.
“이대리님 혹시... 저저길 말하는거에요?”
남자와 몇 차례 교제하면서 모텔을 안가본건 아니었지만 은설은 모텔을 선호하지 않는다. 위생적이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모텔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한몫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굳이 모텔을 가지 않더라도 4~5성급 호텔 숙박비를 부담스러워 할 남자는 애초에 만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왜요? 그렇게 자신만만하시더니 막상 확인하려니까? 쫄려요? 은대리님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시는 줄 알았는데”
현우는 은설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린다.
“제가 언제 안 간다고 했나요? 빨리 앞장서요.”
‘큭큭’
발끈하는 은설과 현우는 낡은 모텔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모텔 카운터에 앉아있던 주인장은 인사를 하다 말고 은설을 위아래로 훑는다. 그녀는 오늘 짧은 테니스 스커트와 배꼽이 훤히 보이는 타이트한 크롭티를 입고 있어 유독 남정네들의 끈적한 시선을 받았었다. 그런데 이 모텔주인은 대놓고 은설을 처다보고 있었다. 은설은 그런 뻔뻔한 시선에 지지 않고 중년의 주인장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아 대실 얼마죠?”
“2만오천원입니다. 크흠”
강한척 하고 있지만 끈적한 시선에 은설은 두손으로 꽉 치맛자락을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치마를 내려 허벅지를 가렸지만 크롭티를 입은 탓에 매끈한 복부가 더욱 더 잘 드러난다.
‘이거 이거 좀 놀려볼까.’
“아 잠깐만요.”
현우는 일부러 현금을 찾는척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태 같은 모텔주인의 시선에 은설의 얼굴이 붉어지고 몸이 파르르 떨리는게 고스란히 현우에게 보였다.
“은 대리님 제가 현금이 없어서 그런데 좀 부탁드려요.”
“네에에?”
“아 진짜 없어요. 빨리요 기다리시잖아요.”
“하아... 정말로 여기요...”
지갑은 꺼내지도 않은 채 능글맞은 현우의 요청에 은설은 주뼛주뼛 카운터로 다가와 현금을 건낸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가슴과 허벅지 복부에서 눈을 떼지 않는 이 변태 주인장의 시선에 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진다.
“여기... 꺅!”
“흐흐 왜 이렇게 놀라요.”
돈을 내미는 손까지 덥썩 움켜쥐는 모텔주인 때문에 깜짝 놀란 은설.
‘이 사람은 뭐야... 진짜 아 뭐 묻은거 같은데.’
손에 묻은 이물질을 손수건에 비비며 딱는 은설.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채 모텔주인을 노려보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진다. 두 사람은 이내 모텔방으로 들어간다.
“허어... 저년도 죽이는구만 헉헉헉.”
카운터에는 중년남성의 거친 숨소리와 무언가를 마구 비비는 소리만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