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씨이이...”
하루종일 최현민에게 카톡과 메신저를 남겼지만 전부 읽씹 당한 혜리는 근무시간 내내 주어진 일도 하지 않고 애꿎은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가 먼저 작업 걸어 놓고’
밥 몇 번 영화 한번. 이제 슬슬 썸에서 사귀는 관계로 넘어가려는 중요한 시기였는데. 슬슬 가벼운 스킨쉽 정도는 받아줄 생각이었던 혜리는 현민의 일방적인 무관심에 손발이 부들부들 떨린다.
항상 남자들의 연락을 받기만 해서일까? 혜리는 이렇게 자신의 연락이 씹힐 줄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현민의 무관심에 혜리는 오히려 더 오기가 생긴다. 예전 같았다면 그냥 쿨하게 넘기고 말 해프닝이겠지만 업무시스템으로 증폭 시킨 현민에 대한 [호감]은 그녀를 질척거리게 만든다. 평소와 다른 자신이었지만 혜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 혜리씨 퇴근 안 해요?”
평소라면 5시50분부터 피씨까지 끄고 퇴근준비를 하던 그녀가 6시가 넘어도 자리에 있자 팀원들이 의아한 듯 한마디씩 던진다.
“아... 오늘은 다른부서 친구랑 같이 퇴근하려구요.”
“그래요? 전 먼저 들어갈게요.”
하나둘 부서원들이 퇴근하지만 혜리는 요지부동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옆자리에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현우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깨닫는다.
‘최현민이 야근중인가보군.’
메신저를 검색하자 역시나 현민은 아직 로그인 상태. 아쉬운 쪽인 김혜리가 그를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큭큭 그럼 고생해라.’
“혜리씨 그럼 저도 먼저 퇴근할께요. 내일 봐요.”
“네에 이대리님 들어가세요.”
김혜리는 모니터를 뚫어져다 쳐다보다가 현우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습관적으로 짓는 눈웃음이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겠지만 그녀의 속내를 알고 있는 현우에게는 통하지 않는 여우짓이였다.
부서원이 모두 퇴근하고도 한두시간쯤 지났을까?
‘어? 이제 퇴근하나 보다.’
9시쯤 다 돼서야 최현민의 메신저가 로그아웃 된다. 혜리는 기다렸다는 듯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드디어 1층 로비에서 퇴근하는 최현민과 마주한다.
“최주임니임!”
“...아 혜리씨.”
평소라면 우연히 마주친 혜리를 어떻게든 꼬셔 술자리로 데려갔을 현민이지만 지금은 그럴 체력이 없다. 야근까지 하며 하루종일 업무에 시달린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퇴근뿐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퇴근하세요?”
“요즘 업무가 좀 많네요... 그러는 혜리씨는요?”
“저두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헤헤.”
“아 최주임님 저녁 드셨어요? 배고프시죠? 저두요!! 저번에 영화에 밥에 사주셨으니까 오늘은 제가 저녁 쏠께요!”
선심쓰듯 말하는 혜리. 그러나 자신이 먼저 밥을 산다고 해도 현민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아 미안해서 어쩌죠? 아까 일하면서 간단히 먹어서요. 저녁은 다음에 먹어요. 우리.”
예상하지 못한 현민의 거절. 그러나 김혜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먼저 드셨구나... 그럼 다음엔 꼭 먹어요.”
“아 그럼 저 집까지 태워다 주시면 안돼요? 저번에 차 구경 시켜주신다고 하셨잖아요.”
혜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제차 자랑을 은근히 했던 현민.
‘설마 이렇게 늦었는데 태워 주겠지’
‘하아... 귀찮아 죽겠네. 데려다 주면 또 30분은 돌아가는데.’
며칠째 새로 받은 시스템 때문에 시달린 현민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악.
김혜리에 대한 [호감] - 감소 활성화
현우가 감소시킨 [호감]까지 한몫하며 결국.
“후우... 혜리씨 제가 진짜 힘들어서요. 오늘은 먼저 갈께요.”
현민은 매정하게 혜리를 뿌리친다.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애교 넘치는 눈빛으로 현민을 처다보던 혜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민은 뒤돌아 성큼성큼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어...어...이...이대리님. 이대리님!!!”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건물 안에서 김혜리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 * *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김혜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자신은 항상 원하면 누구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당혹감이었다. 꽤나 괜찮은 조건의 남자였고 처음에는 다른 남자들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조금 관계를 진전시켜볼까? 라고 생각한 순간 현민은 갑자기 180도 달라졌다.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구질구질하게 매달려봤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대하는 현민의 태도는 더욱 냉담해져만 간다.
“하... 정말 그만 좀 연락해. 그리고 나 너 차단했어.”
참다 참다 터져 나온 최현민의 짜증. 애써 준비해 온 선물이 바닥에 나뒹군다. 슬픔과 분노, 수치심에 혜리는 멀어지는 현민을 노려본다.
이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설레던 영화관 데이트와 주고받던 메시지. 그때 느끼던 [호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이건 [집착]이다. 알고 있지만 그녀는 이런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다.
* * *
“야 이현우.“
“왜?”
“니네팀에 존나 이쁜 인턴 있잖아.”
“김혜리? 근데 왜?”
“걔 뭐 인성에 문제 있냐?”
“음... 인성은 별 문제 없는데 일은 존나 안하는 폐급이긴 하지.”
흡연실에서 만난 재훈은 대뜸 김혜리에 대해 묻는다.
“너도 알지? 혜리씨가 우리팀에 그 폐급새끼 좋아하는 거?”
“야 그거 전에 내가 말해준거잖아. 그리고 회사에서 요즘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초딩도 알 듯.”
“아니 최현민 그새끼는 진짜 고자새끼인인가? 나 같음 낼름 얌얌얌 맛있게 먹었다. 산삼보다 인삼보다 스무살~ 슴살!”
“미친새끼...냅둬라. 지가 싫다는데.”
“하아... 아주 배가 부른 놈들이 많아. 야. 우리 혜리씨랑 밥 한번 먹자. 내가 최현민 저 병신보다 잘 해 줄 수 있다.”
“큭큭큭 야 말도마라. 걔 요즘 완전 최현민 때매 저기압임.”
양심의 가책도 없는지 현우는 능청스럽게 재훈에게 대꾸한다. 재훈의 말처럼 얼마나 김혜리의 대쉬가 적극적인지 요즘 회사에서 모르는 직원이 없을 정도로 핫한 이슈였다.
“에라이 도움도 안 되는 놈.”
“내 코가 석자다. 임마. 들어 간다.”
자리로 돌아온 현우는 스마트폰에 업무시스템을 활성화 시킨다.
[사용자 : 김혜리]
[나이 : 20] [키 :161] [체중 : 46]
[체력 : 9/10] [매력 : 8(+1)/10] [성욕 : 3/10] [멘탈 : 1(-7)/10]
[만족도 : 잠김] [호감도 : 잠김]
[심리 메시지]
인턴생활에 대한 [짜증] - 감소 활성화
최현민에 대한 [집착] - 증폭 활성화
[사용자 : 최현민] 주임
[나이 : 28] [키 :185] [체중 : 73]
[체력 : 7/10] [매력 : 8/10] [성욕 : 4(-3)/10] [멘탈: 2(-6)/10]
[심리 메시지]
담당 시스템 관리에 대한 [짜증] - 증폭 활성화
김혜리에 대한 [비호감] - 증폭 활성화
적당한 스트레스와 빗나간 두 사람의 감정. 약간의 재료만으로 훌륭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 아니 터치 몇 번이 태풍이 되어 혜리와 현민의 관계를 찢어버렸다. 생각보다 빠른 전개에 현우는 다시금 업무시스템의 [감정조작]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김혜리의 경우 최현민에 대한 [호감]이 [집착]으로 급발진 했다. 그와의 관계가 멀어질수록 인턴생활에 대한 [설렘] 역시 [짜증]으로 변모했다.
현우는 혜리가 혹시나 퇴사할까봐 인턴생활에 대한 [짜증] 감정을 감소시켰다. 그럼에도 혜리의 표정을 보건데 처음의 생기발랄한 모습은 온대간데 없다.
최현민의 경우에는 혜리에 대한 [호감]이 [비호감]으로 뒤집혀 버렸다. 가뜩이나 몰려버린 업무 때문에 예민하던 상황에 관심도 없는 김혜리의 잦은 연락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다. 덕분에 현민은 복도에서 김혜리를 만나기만 해도 인상을 쓰며 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민의 이러한 반응은 자신만만했던 김혜리의 멘탈을 완전히 부셔버렸다. 외모를 무기로 지금껏 쌓아왔던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리고 이제 현우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멘탈이 최저수치에 도달하면 업무시스템에서 감정의 대상을 자신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 그리고 간단한 터치 몇번으로 현우는 김혜리의 감정의 대상을 자신으로 변경한다.
최현민에 대한 [집착] → 이현우에 대한 [집착]
‘그래도 [집착]은 좀 무서우니까.’
영화 미저리의 한 장면을 생각하며 현우는 재빨리
이현우에 대한 [집착] - 감소 활성화(new!)
김혜리의 [집착]을 감소시킨다.
‘자아... 이제 슬슬 입질이...’
“이 대리님!”
‘아 씨발 깜짝이야.’
스마트폰을 내리자마자 옆자리에서 고개를 확 돌려 자신을 부르는 김혜리.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화들짝 놀란 현우는 애써 침착하게 대꾸한다.
“왜...왜요. 혜리씨.”
“오늘 같이 점심 먹으로 가요오.”
다른 부서원이 들을까 현우의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 덕분에 은은한 라벤더향의 샴푸향이 느껴진다. 확실히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진한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기분 좋은 살내음이 그를 기분 좋게 한다.
‘역시 여자는 어린 게 깡패야.’
“그러죠 뭐.”
승리감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현우는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몇 번이나 점심을 사달라고 하던 혜리였지만 이렇게 현우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업무시스템의 조작으로 현민을 향한 혜리의 [집착]이 이제 현우에게로 전이 되었다.
“헤헤헤.”
눈웃음까지 살살 치며 기분 좋게 웃는 혜리. 저 웃음이 가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뭐 귀엽긴 하네.’
미모가 미모인지라 그녀의 눈웃음에 샤르르 풀려버리는 현우였다.
혜리의 [집착]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둘의 점심 분위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 대리니임 제가 맨날 얻어먹기만 하고 다음엔 한번 대접 할게요.”
“아 됐습니다. 벼룩에 간을 빼먹지 인턴한테 밥을 뜯어먹어요.”
“에이... 그래도 많이 사주셨는데 저도 월급 받습니다! 무시하지 마세요?”
“진짜 미안하면 담에 사요.”
“네에~”
남자들의 호의에 익숙한 김혜리가 지갑을 열어본 적이 있었던가? 입사했을 때 현우도 몇 번 밥을 사준적은 있었지만 그녀가 먼저 밥을 산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 혜리가 먼저 밥을 산단다.
‘이것도 업무시스템의 영향이겠지.’
어쨌든 지가 먼저 밥 사주고 싶다는데 나쁠 건 없다. 그렇게 현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앞에 놓인 제육볶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 우우우웅
- 대리님 뭐하세요오?
- 오늘 점심 너무 맛있었어요~
- 다음에 언제 먹을까여?
- 혹시 인별그램 하세요? 저랑 맞팔해요.
은설에 보지에 박았던 로터처럼 쉴 새 없이 떨어대는 현우의 폰. 부서 단톡방말고는 오는 메시지도 없던 그였기에 적극적을 넘어 공격적인 혜리의 메시지 폭탄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간단하게 답장을 했더니 또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내는 혜리.
‘지금 [집착] 감소시킨 거 맞지?’
[집착]을 감소시켜서 이정도지 최현민에게는 어떻게 했을지 상상만으로도 소름끼친다.
‘그래도 일단 적당히 받아주자.’
일방적인 [집착]은 언제든 광기로 변할 수 있다. 혜리의 [집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현우 본인의 대응이 중요하다.
“하아...”
업무시스템으로 행사하는 심리조작의 효과를 잘 알고 있는 현우는 혜리의 [집착]을 해소시키기 위해 하루종일 깨똑을 주고받아야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식사와 끝나지 않는 무한루프의 깨똑을 밤새도록 주고받은 결과
[사용자 : 김혜리]
[나이 : 20] [키 :161] [체중 : 46]
[체력 : 9/10] [매력 : 8(+1)/10] [성욕 : 3/10] [멘탈 : 4(-4)/10]
[만족도 : 잠김] [호감도 : 잠김]
[심리 메시지]
인턴생활에 대한 [설렘] - new!
드라마 같은 로맨스에 대한 [기대] - new!
이현우에 대한 [호감] - new!
최현민 덕분에 깨진 그녀의 멘탈을 현우가 적당히 수습해 줘서 일까? 혜리의 미저리 같은 [집착]은 다행히 사라졌다.
그리고 감정의 공백은 이현우에 대한 [호감]으로 변모했다. 만약 최현민이 혜리의 애정공세를 적당히 받아줬다면 그가 [호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현우는 업무시스템의 [심리 메시지] 조작으로 결국 김혜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