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그 뒤로도 현우의 미심쩍은 행동들은 계속 되었다. 뒤치기 당하면서 무심코 뒤돌아본 은설은 허리를 움직이며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현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뭐...하는 하악... 하윽!”
그만 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곧바로 이어진 현우의 거친 삽입 때문에 항상 은설은 침대에 고개를 처박고 밀려오는 쾌감을 견디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 찰칵찰칵
정사가 끝난 뒤 잠결에도 들려오는 스마트폰의 셔터음.
뭐하는 짓이냐며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고인처럼 굳게 입을 다무는 현우.
섹스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기절하듯 잠드는 사이에, 옷을 갈아입는 순간, 그리고 샤워하는 순간에도 현우의 스마트폰 카메라는 은설의 모습을 계속 찍어댄다.
[사용자 은설의 애정도가 3 감소합니다.]
‘뭐 [애정도] 3 하락이면 양호하네.’
최대한 조심해서 촬영한다고 했지만 은설이 도촬을 알아챌 때마다 그녀의 [애정도]가 감소한다.
대놓고 알몸을 촬영할 때마다 5씩 [애정도]가 깍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보다는 적은 수치였다. 아마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라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하는 현우였다.
‘큭큭큭 싫으면 어쩔 거야? [애정도]면 만사 오케이인데’
업무시스템으로 현우와 [연인관계]로 묶인 탓에 은설은 자신의 알몸을 촬영하는 현우의 행동을 제지 할 수 없다. 그녀의 할 수 있는 최대의 반항은 그저 [애정도] 하락 정도였다.
그 마저도 현우의 절륜한 정력에 금세 최대수치까지 다시 회복한다.
[사용자 : 은설]
[애정도 : 10/10]
- 찰칵찰칵
현우의 스마트폰 앨범에는 한 장 두 장 은설의 수치스러운 모습들이 차곡차곡 저장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알 수 없는 불안감도 증폭된다.
* * *
“이 대리니임~ 안녕하세요~”
콧소리가 잔뜩 들어간 혜리의 애교 섞인 인사가 사무실에 울린다.
“쉿쉿! 너 뭐...뭐하는거야?”
“왜요오... 인사두 못해여? 힝...”
현우를 바라보는 혜리의 얼굴은 ‘전 아무것도 몰라요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순진무구하지만 이미 그 구미호 같은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너 일부러 모르는 척 하지 마라.”
“흥... 재미없어요. 이대리님.”
“일단 메신저 접속해봐.”
현우 옆자리에 앉은 혜리는 곧바로 책상에 놓인 컴퓨터의 전원을 켠다. 곧이어 타닥타닥 경쾌한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 누가 사무실에서 친한 척 하래? 옆에 김과장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잖아.
- 힝 ㅜㅜ 이대리님은 제가 그렇게 싫어요?
- 애교로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진짜 조심해.
- 네 ㅜㅜ
- 그건 그렇고 너 지금 최현민이랑 어떻게 되고 있어?
- 최주임 진짜 뻥 안치고 5분에 한 개씩 톡 보내요.... 넘 귀찮
- 뭐라는데?
- 뭐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얼굴 보고 이야기 하자. 한번 만 볼 수 없냐? 끝도 없어요. 아 징짜 짱나여
- 적당히 튕기다가 만나줘. 밀당 잘하니까 알아서 잘해
- 무슨 말씀이세여 이 대리님한테는 밀당 안해요오
- 아 근데 오늘 이대리님 집에서 자구가도 돼여? 저 밤에 외로워용(울먹거리는 이모티콘)
- 너 하는 거 봐서
- 히잉...ㅠㅠ 알겠어요.
- 최현민이랑 데이트 일정 잡으면 보고해
- 넹 알겠습니다 이대리님~
사내 메신저로 대화가 끝나자마자 혜리는 스마트폰을 들고는 그동안 쌓인 최현민의 깨똑을 천천히 읽는다. 물론 답장은 바로 하지 않는다.
사무실 전화 한통 받고 톡 하나. 간식함에 간식을 정리하고 또 하나. 여자 인턴들과 실컷 수다 떨고 와서 하나. 내용을 보지 않아도 최현민의 애를 태우는 밀당 중이리라.
새내기다운 그 풋풋하고 귀여운 얼굴과는 다르게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남자의 마음을 들었다놨다하는 여우 그 자체였다.
* * *
“여기야 여기!”
멀리서 최현민 주임이 반갑게 혜리에게 손을 흔든다. 그러나 그런 그와 대조적으로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
“하하하... 왔어?”
- 찌릿
어색하게 웃는 현민과 그를 노려보는 혜리.
“그...그럼 카페로 일단 갈까?”
그 지옥 같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현민은 그녀를 카페로 에스코트한다.
현민이 주변답사 미리 한 덕분에 심사숙고해서 고른 카페는 다행히도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깔리는 분위기가 썩 괜찮은 곳이었다.
“뭐 마실래? 음료는 내가...”
“괜찮아요. 제 음료는 제가 주문할께요.”
현민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카운터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혜리. 뻘쭘한 듯 쓴웃음을 짓던 현민은 그녀의 계산이 끝난 뒤 자신의 음료도 주문한다.
“음료 나왔습니다~”
“내가 가져올게 응? 자리에 있어. 제발”
호다닥 일어나서는 잽싸게 음료 두 잔을 가져오는 현민. 그 몸놀림에서 애타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서 절 왜 보자고 하신거에요? 최주임님.”
- 쭈우웁 꿀꺽
테이블을 두고 혜리와 마주앉은 현민은 목이 타는지 음료는 쭈욱 들이킨다.
남심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키는 눈웃음과 콧소리 가득한 애교는 온대간데 없다. 그저 차갑게 식은 아니 오히려 뜨거운 화를 억지로 참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현민은 한없이 위축된다.
“어... 그러니까... 저번주에 부산 일은 말이야...”
준비했던 멘트는 떠오르지 않고 찐따마냥 말을 더듬는 현민. 항상 자신만만했던 그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그 날의 일은 정말 사과하고 싶어. 사실은 과음을 했는지 기억이 없지만...”
- 쾅
“기...기억이 없다구요?!?!?”
어우야 언냐들 나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가 이런 느낌일까? 혜리는 정말 겁탈이라도 당한 듯 온몸으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낸다
부르르 떨리는 두 손과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매서운 눈빛에 현민은 본능적으로 잣됐다는 생각이 든다.
‘아 시밤 잘못 말했다...’
“저...저는 분명...분명히 그때 처음이라고 말했는데...”
“싫다고... 아프다고 계속 소리 질렀는데 흑흑흑....”
자신이 겁탈당한 상황에 완전히 심취했는지 혜리는 닭똥 같은 눈물까지 뚝뚝 흘린다.
‘이 대리님 말씀대로 나 정말 연기에 소질이 있나봐.’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는 혜리와
‘아 우는 모습도 존나 이쁘다...’
이 상황에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혜리의 얼굴을 보며 병신 같은 생각을 하는 현민.
어쩌면 이 둘은 꽤나 잘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내...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 줄래? 진짜 내 진심은 그게 아니었어.”
“이미 쏟아진 물을 어떻게 다시 담아요? 더 이상 끔찍할 수 없는 ‘그 경험’... 그거 알아요? 저 그날 이후로 계속 악몽을 꿔요. 그 순간을 계속 반복해서”
“,,,”
최현민은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처럼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다. 분명 저녁을 먹으면서 적당히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분명 자신의 주량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와인을 마신 순간부터 완전히 블랙아웃.
일어나 보니 처녀혈로 보이는 핏자국으로 물든 침대보와 온몸에 붉은 자국들이 가득한 혜리의 알몸이 눈앞에 있었다.
물론 혜리의 첫 개통식은 현우가 차지했지만 남겨진 정황으로 봐서는 빼도박도 할 수 없는 현민의 짓이 되어 버렸다.
“흑흑흑....”
“내...내가 널 책임질게!”
“...네?”
“어 음... 지금 상황에 자랑은 아니지만 나 집안에 여유도 있고 모아둔 돈도 꽤나 있고... 혜리 너 하나 충분히 책임 질 수 있어!”
“....”
“푸웃...”
뜬금없는 현민의 프로포즈(?)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당황해서 내뱉긴 했지만 현민의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심리 메시지]
김혜리에 대한 [호감] - 증폭 활성화
김혜리에 대한 [죄책감] - 증폭 활성화
평소 현민의 이상형은 처음 보는 여자일 정도로 여성편력이 심한 그는 결혼이라는 한심한 수갑으로 자신의 몸을 구속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업무시스템으로 증폭된 [호감]은 그의 가치관까지 바꿔놓을 정도였다.
“무슨 고백이에여 그게. 저 그리고 이제 스물이거든요? 왜 벌써 결혼을 해요.”
현민의 황당한 고백에 혜리는 어느 정도 화가 풀렸는지 살짝 미소를 짓는다. 물론
‘그럼 이 정도에서 용서해 줄까?’
화가 난 것도 마지못해 용서해주는 것도 모두 연기였지만.
“그럼 우리 사귀는 것부터 시작하자.”
“좋아요... 대신!”
“대신?”
“저 그날 일 때문에 아직 좀 무서워요... 그러니까 스킨쉽은 한동안 금.지에요. 알겠죠?”
“응응 물론이지. 걱정마 내가 잘할게.”
증폭된 [죄책감] 덕분에 현민은 혜리의 파격적인 조건도 고민 없이 받아드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여자는 따먹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었지만 혜리에게 만큼은 그 조차도 양보한다.
“헤헤... 약속했어요 최주임님? 믿을게요.”
완전히 기분이 풀렸는지 남심을 녹이는 그 눈웃음을 치며 현민의 손을 살짝 잡는다.
“그럼 다음 데이트 코스는 뭐에요? 안정했다고 하면 화낼꺼에여!”
“하하하 물론 다음 코스도 다 준비되어 있지.”
옷 주머니에서 두 장의 영화 상영권을 꺼내는 최현민.
“기분도 풀 겸 영화 예매해놨어. 요즘 평이 좋더라고.”
최근 절찬 상영중인 로맨틱코메디 영화 티켓 두 장. 혜리도 마침 보고 싶던 영화인지 표정이 밝아진다.
“그럼 빨리 가요 최주임니임~”
언제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기분이 풀린 혜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현민.
혜리는 짧은 테니스스커트와 배꼽이 살짝 보이는 블루 크롭티를 매치했는데 복부와 허리라인,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꽤나 노출이 있는 복장이었다.
‘쓰읍... 살결이 진짜 보들보들 했는데...’
해운대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촉감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듯 했다. 현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려고 했지만
- 탁
“스킨쉽은 아직 안돼요 최주임님. 우리 약속 했죠?”
“아 그렇지 하하...”
혜리에 철벽방어에 속절없이 후퇴해버리고 만다.
호텔 아침에 보았던 이불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던 혜리의 속살과 자신이 만들어 놓은 뜨거운 정사의 흔적들(물론 현우가 만들어 놓은 흔적들이지만)이 떠올라 현민은 자신도 모르게 빳빳하게 자지를 세운다.
‘그래 이제 정식으로 사귀는데 기회는 많겠지.’
조만간 혜리를 정복하리라 굳게 마음 먹은 현민은 혜리와 함께 극장으로 향한다.
- 이대리니임 저 이제 극장으로 가요~
물론 혜리의 이동 동선은 모두 실시간으로 현우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 웅성웅성
주말의 극장은 가족과 연인들로 북적거렸다. 최현민과 혜리는 아직은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선남선녀 커플 그 자체였다.
“팝콘 먹을래?”
“네에! 영화관에선 꼭 먹어야죠~”
최현민은 음료 두 잔과 팝콘 세트를 구매해 온다. 달콤한 팝콘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상영관으로 입장한다.
몇 편의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한다. 영화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였다. 혜리도 롤코를 좋아하는 여대생이었고 꽤나 집중해서 관람하고 있었다.
- 우우우웅
손 안에 있는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리기 전까지 말이다.
“최 주임님 저 잠깐 화장실 좀...”
“어 그래. 조심히 갔다와.”
혜리는 현민에게 작게 속삭인다. 달콤한 그녀의 숨결이 귓가를 자극하며 불끈 아랫도리를 꼴리게 한다.
‘하아 키스박고 싶다.’
사실 최현민이 로맨틱코미디를 고른 것은 적당한 무드를 만들려는 속셈도 있었다. 영화는 여주와 남주의 알콩달콩한 썸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고 혜리와 스킨쉽을 하기에는 적당한 기회였다.
‘아 하필...’
‘그러고 보니 분명 해운대에서도 이랬던 거 같은데?’
찝찝한 기분이 든 최현민은 김혜리의 뒷모습을 응시하지만 어두운 상영관에서 그녀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