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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화 >





혜리가 호텔에서 폰도 두고 급하게 사라진 뒤, 다음날 회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아버지는... 괜찮으셔?”



굳은 표정의 최현민은 간신히 감정을 억누른 채로 혜리에게 묻는다.



“네! 단순한 과로셨대요. 휴우... 정말 다행이지 뭐에요. 헤헤”



현우의 지시에 따라 현민과 호텔까지 가서 일부러 스마트폰을 두고 나온 혜리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물론 그녀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별일 없이 건강히 지내고 계신다.



“아 그리고... 혜리 너 폰 두고 갔더라. 자 여기.”



“맞아요!! 폰이 없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챙겨주셔서 고마워요 최 주임니임.”



한동안 답답했는지 혜리는 폰을 받자마자 잠금을 풀고 새로 온 메시지를 확인한다.



“근데... 최주임님 혹시 제 폰 보신 건 아니죠?”



- 뜨끔



혜리의 예리한 질문에 물건을 훔치다 걸린 사람처럼 깜짝 놀란 현민. 하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한다.



“어...어? 뭔 소리야. 잠금도 걸려있는데.”



“분명 전화를 한 뒤에 통화목록 상태로 둔거 같은데... 아닌가? 흐음...”



“뭐...뭔가 니가 착각했겠지.”



“그렇겠죠? 그럼 근무시간이니까 전 먼저 들어갈게요.”



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혜리는 사무실로 돌아간다.



“하아...”



혼자 남겨진 최현민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하다.



* * *



“어때 보여?”



“봤어요. 분명히! 표정도 안 좋고요. 또 전 통화목록 상태에서 폰을 잠궜는데 다시 켜보니 홈 화면이었어요. 확실해요...히잉...”



자신의 알몸사진과 익명의 남성과 함께 자위한 영상을 현민이 봤다고 생각하자 혜리는 갑자기 수치스러운 기분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러나 동시에 알 수 없는 찌릿찌릿한 느낌이 온 몸을 휩쓴다.



‘하아... 이상해애...왜 몸이...’



“잘했어. 그럼 이제 최 주임이 어떻게 나오는지 볼까?”



“분명 헤어지자고 하지 않을까요? 그런 걸 다 봤으면...요...”



“그래. 그렇겠지? 음 일단은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 하자.”



현민과 헤어지고 사무실로 복귀한 혜리와 속닥속닥 대화를 주고받던 현우는 너무 그녀와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팀원들에게 보이기 싫었는지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바로 헤어지자고 안 했다고?’



현우는 분명 최현민이 혜리를 다시 만난다면 곧바로 이별을 통보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업무시스템으로 증폭시킨 혜리에 대한 [호감]과 [죄책감]을 원래대로 돌려놨기 때문이었다.



[사용자 : 최현민]

[나이 : 28] [키 :185] [체중 : 73]

[체력 : 7/10] [매력 : 8/10] [성욕 : 10(+3)/10] [멘탈: 1(-7)/10]



[심리 메시지]

담당 시스템 관리에 대한 [짜증]

김혜리에 대한 [죄책감]

김혜리에 대한 [집착]

김혜리에 대한 [애증] - new!



“아...”



그러나 업무시스템에서 최현민의 상태를 확인한 현우는 자신의 예상과 완전히 벗어난 현민의 상태창을 확인하고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작살난 [멘탈] 수치와 혜리와 하지 못한 탓인지 끝까지 치솟은 [성욕] 수치.



게다가 혜리에 대한 [호감]은 사라지고 [애증]이 신규로 생겨버렸다. 애증. 그야말로 사랑과 미움이 동시에 섞인 너무나도 역설적인 감정 아닌가.



‘내가 너무 망가트려버렸나?’



최현민에 상태창을 보고 현우는 살짝 죄책감이 든다.



부산 호텔에서의 혜리 첫경험 조작, 그리고 다시 사귀었지만 혜리의 스킨쉽 거부. 마무리로 알 수 없는 남자와의 랜덤채팅 자위영상까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니 현민의 멘탈이 남아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으음...’



그러나 현우는 이내 죄책감 보다는 혜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애증]과 [집착]까지 생겨버린 현민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죄책감]은 계속 증폭을 유지한다.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관계의 주도권을 혜리가 쥘 수 있어.’



‘그리고 애증... 이게 문제인데... 이걸 증폭시켜도 되나? 존나 불안한데 차라리...’



[사용자 : 최현민]

[심리 메시지]

담당 시스템 관리에 대한 [짜증]

김혜리에 대한 [죄책감] - 증폭 활성화

김혜리에 대한 [집착] - 감소 활성화(new!)

김혜리에 대한 [애증]



‘이렇게 하는 게 낫겠어.’



최종적으로 현우는 현민의 [죄책감] 감정은 증폭시키고 [집착]을 감소시키기로 결정한다. [애증]까지 있는데 [집착]을 그냥 두기에는 위험도가 너무 컸다. 현민이 미저리가 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문제의 감정 [애증]은 일단 계속 관찰해보기로 한다.



‘최현민 난 분명 선택권을 줬어. 결정은 니가 한거다.’



잠깐이지만 업무시스템의 감정조작을 모두 풀어준 상태에서 최현민이 결정한 결과는 예상을 깨고 ‘김혜리를 포기하지 못한다’ 였다.



물론 지금까지 조작이라고는 할 수 있는 대로 마구 해놓고 이제와서 그런 현민의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어쨌든 현민은 혜리의 변태 같은 자위영상까지 봤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귀기로 결정 한 듯하다.



‘분명 이새끼 바람둥이였는데 말이야.’



지금 보니 이런 순애보가 또 없다.



따먹지 못한 혜리에 대한 [집착]인지 정말로 업무시스템으로 조작하기 전부터 그녀를 사랑할 운명이었는지 현우가 지금와서 현민의 원래 감정을 알 방법은 없다. 굳이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건 그렇고 혜리야 한동안 더 고생해야겠다. 큭큭큭’



최현민과 헤어지기 위해 혜리는 현우가 지시한 각종 수치스러운 짓까지 했는데 결국 현민을 떼어 놓지 못했다. 그녀의 운명 역시 어쩌면 계속 최현민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닐까?



업무시스템으로 혜리와 현민의 감정을 쥐락펴락 가지고 논 주제에 현우는 되도 않는 운명론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 * *



“히잉...”



분명 자신의 더럽고 음탕한 영상과 사진을 모두 봤을 텐데 예상과 다르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않는 현민 때문에 답답한 것은 혜리였다.



‘빨리 이대리님과 정식으로 사귀고 싶은데에...’



“씨이...”



혜리 역시 헤어지기 위해 꽤나 쌀쌀맞게 최현민을 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현민의 태도는 한결같다. 여전히 퇴근 후에 저녁을 같이 먹고 집까지 데려다 준다.



예전처럼 능글맞게 호텔에 가자거나 혜리에게 슬쩍 스킨쉽을 시도하는 것은 여전했다. 마찬가지로 혜리 역시 예전 부산 일을 핑계 삼아 냉정하게 그런 시도를 쳐냈다.



그렇게 최현민과 혜리의 관계는 깨지지 않고 유지된다. 덕분에 답답해 미칠 지경인 것은 혜리다.



“이대리뉘임... 어떻게 어? 헤어지자구 안하는 거에요오...”



“그...그렇게 이상한 짓거리도 다 했는데에...”



퇴근 후 어느 때처럼 혜리를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최현민. 그러나 혜리는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주변 술집에서 현우를 만나 술잔을 주고받는다.



답답한 심정의 혜리가 현우에게 술자리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소주 두 잔 마셔놓고 왜 취한 척 하는거야?”



혜리의 속상한 마음이야 알겠지만 현우는 술도 마시지 않고 취한 척 칭얼거리는 혜리의 행동이 어이없기만 하다.



“흥! 제가 얼마나 답답한지 이 대리님이 아세요? 제 맘도 모르고...”



사실 현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 최현민과 헤어진 헤리와 사귀는 게 회사에 퍼진다면 구설수에 올라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한동안 잘근잘근 씹힐게 분명하다.



길지 않은 직장생활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는 것이다.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적당히 주어진 업무나 하는 것이 공공기관에서 살아남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나고 유명해져봐야 급여 인상이나 빠른 승진 따위는 없다. 공공기관은 닥치고 연공서열 즉, 짬이 많이 찰수록 승진과 급여가 오르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뭐 지금상황에서 어쩌겠어. 최현민이 계속 사귀겠다는데. 조금만 더 참아봐.”



“히잉...”



혜리는 한시라도 빨리 현우와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싶건만 마음도 모르고 계속 최현민과 사귀라는 현우의 말이 서운하기만 하다.



“자!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이만 마무리 하자.”



하도 혜리가 부탁해서 나온 술자리지만 계속 그녀의 징징거림을 듣기는 싫었던지 현우는 금방 술자리를 끝내버린다. 한참 더 신세한탄을 하려고 했던 혜리는 입을 잔뜩 내밀고 불만을 온몸으로 표현했지만 현우는 이미



“나 대리 부른다. 언능 집에 들어가.”



등을 돌린 채 자신의 차로 향하는 중이었다.



“흥... 쳇... 미워요. 이대리님.”



자리가 빨리 끝난 탓에 술도 마음껏 마시지 못한 혜리는 아쉬움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지만 현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뭔가 아쉬움과 서운함이 남아있는 혜리는 폰을 이리저리 만지다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자위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현우의 반강제적인 지시로 했던 만남이었지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덕분일까? 마치 봉인해제 된 것처럼 자위하는 모습을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보여주며 몇 번이나 절정을 느껴버렸다.



‘한번만... 딱 한번만 더 해볼까?’



그때의 짜릿했던 감각을 떠올리면 혜리는 조심스럽게 랜덤채팅 어플 레인을 실행시킨다.



그녀의 계정에는 수많은 남자들의 대화요청이 잔뜩 와 있었다.



“아이...씨 뭐가 이렇게 많아.”



투덜거리며 화면을 아래로 계속 내리던 혜리는 지난번 자신과 영상통화로 자위를 했던 남성의 대화방을 찾아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화방에 메시지를 입력한다.



* * *



“어쭈?”



자신의 차 조수석에 앉아 대리를 부르려고 했던 현우는 자신의 폰에 뜬 의외의 알림에 곧바로 랜덤채팅 앱 레인을 실행시킨다.



- 뭐 해요?



당돌하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혜리.



분명 현우의 지시는 ‘딱 한번 랜덤채팅에 접속해서 남성의 지시대로 행동하고 그 기록을 남겨 놓아라.’ 였다.



그 뒤에 랜덤채팅 레인으로 다른 지시를 내린 적도 없고, 현우는 혜리 역시 그의 지시가 없다면 당연히 다시 접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혜리는 다시 랜덤채팅의 익명의 남성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하하하...”



현우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딴 남자와 다시 대화를 하다니. 물론 그 익명의 남성이 자신이긴 했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혜리의 행동은 명백히 외도. 즉 바람이었다.



‘근데 뭐... 사귀는 것도 아니긴 하지.’



그녀의 이런 행동을 바람 피운다고 할 수 있을까? 현우 역시도 혜리를 최현민과 억지로 붙여 놓고 그 상황에서 즐기고 있는데 말이다.



- 왜?



현우는 혜리의 행동에 놀라기는 했지만 혹시나 자신이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다른 남자와 연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호다닥 답장을 보낸다.



- 이제... 더 안해요?



- 뭘 더 안해?



- 저번엔 이것저것... 시켰잖아요?



- 또 시켜달라고?



- 네...



“하... 애도 정상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호텔에 함께 놀러온 현민에게 약을 먹인 뒤 그 옆에서 첫경험을 치르고, 데이트 내내 불러내 따먹고, 랜덤채팅으로 나체 사진에 자위까지 시킨 주제에 혜리가 정상이길 바랬던 걸까?



현우는 자신의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대는 접어두고 그냥 혜리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한다.



- 좋아 영상통화 받아.



차에 있던 가방을 뒤져 마스크를 꺼낸 현우는 곧바로 혜리에게 영상통화를 신청한다.



- 잘... 들리세요?



화면 너머에는 현우처럼 마스크를 낀 혜리의 얼굴이 보인다. 방금까지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셨는데 이렇게 서로 마스크를 쓴 채 다시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 그럼 준비는 됐겠지?”



- 네...



뭘 기대하는 걸까? 혜리의 대답에서 약간의 떨림과 기대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현우는 그녀의 기대감에 충분히 부응해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