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드디어 초급관리자 딱지를 땠네.”
브론즈, 저렙, 뉴비, 초급. 병신이라는 말은 참아도 게임 못한다는 말은 못참는 한국남자들이라면 극혐하는 단어들이다. 현우 역시 이놈의 ‘초급’ 관리자라는 사실이 계속 거슬리던 차였다.
생각해보니 우스운 일이다. 이제는 회사에서 승진보다 업무시스템의 관리자 권한 승급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깟 대리 달아봐야 월급이야 쥐꼬리만큼 올라갈 뿐이었고 사원, 주임과 다르게 일 좀 시켜볼만한지 업무만 잔뜩 들어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현우가 업무시스템에 관리자 권한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했다.
“음...처음 승급은... 그래. 서진아를 따먹었을 때였지.”
※ 업무지시 (사원급)
[심리 메시지를 활용하여, 매력포인트 7 이상 여직원과 성교하세요. 업무지시일로부터 한 달 안에 완수해야 합니다.]
[성공 시 3포인트 지급]
[실패 시 3개월 감봉]
생각해보니 참 거지같은 [업무지시]였다. 벼룩에 간을 떼어 먹어야지 직장인의 월급을 건들다니 말이다. 직장인의 월급은 최후의 순간까지 반드시 지켜줘야만 하는 ‘작고 소중한’ 것이다.
‘설마...’
갑자기 느껴지는 불안감. 그...그렇다는 건?
[업무지시 항목을 확인해 주세요.]
갑자기 시스템 오류라도 났는지 주절주절거리는 시스템 알림을 음소거 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현우는 [업무지시] 항목을 활성화 시킨다. 그러자 오랜만에 등장한 새로운 지시가 보인다.
※ 업무지시 (대리급)
[심리 메시지를 활용하여, 매력포인트 8 이상 여직원을 공략완료 하세요. 업무지시일로부터 3개월 안에 완수해야 합니다.]
[성공 시 1포인트 지급]
[실패 시 파면]
“파...파면이라고!”
저기 옆동네에서는 땅투기로 수십억씩 해쳐먹어도 견책이던데? 거 너무한 거 아니오? 시스템 양반.
“게다가 보상은 왜 줄었어? 분명 초급 달 때는 포인트 3개 줬잖아. 누가 봐도 이게 더 어려운 [업무지시] 아니야?”
[원래 게임에서도 초보자 보상은 좋잖아요?]
“아니 그래서 이게 게임이냐고.”
[게임처럼 즐기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
묘하게 반박할 수 없는 시스템 알람을 말없이 닫아버리고는 현우는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한다.
[사용자 이현우]
[등급 : 중급 관리자] - new!
[나이 : 29] [키 :177] [체중 : 68]
[체력 : 4/10] [매력 : 3/10] [정력 : 7/10] [통솔 : 4/10]
[잔여포인트 : 3] - new!
[잔여 근로계약서 : 95개]
[월 추가급여 : 3,012,000원]
[근로계약 항목이 해금되었습니다.]
“흐흐흐흐”
거지같은 [업무지시] 덕분에 화가 나긴 하지만 3포인트나 남아있는 [잔여포인트]를 보며 현우는 뿌듯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체력에 몰빵할까? 그때 최현민한테 그렇게 당할 줄을 몰랐는데.’
새삼 [체력] 즉 피지컬의 중요성을 현민에게 털리고 난 뒤 깨달은 현우는 갑자기 [체력]이 끌린다.
‘아니지 역시 [매력]인가?’
그렇게 멘토로 김혜리에게 잘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관심도 받지 못한 것은 평범하다 못해 너무나 평범한 현우의 외모도 크게 작용 했으리라. 그러나 [매력]만 있으면 구질구질하게 [심리 메시지] 조작 따위 할 필요 없이 여자들을 후리고 다닐 수 있으리라.
‘아니지. 그렇게 따먹으면 뭔 재미야.’
기생오라비 같은 외모로 여자들을 따먹어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현우는 이미 업무시스템을 이용해 서진아의 엉덩이에 음탕한 모양의 타투도 새겨 넣을 수 있었고, 김혜리는 랜덤채팅으로 알지도 못하는 익명의 남성 앞에서 자위를 하게 만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탈계정을 만들어 그 도도한 은설의 알몸사진을 업로드하고 있다. 얼굴은 가렸지만 여기저기 퍼질 정도로 그녀의 몸매는 커뮤 사이에서는 꽤나 핫한 모양이다.
이런 행위들을 [매력]을 올린다고 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이다. 경찰서에 안가면 다행이지.
피지컬이 딸려서 좀 쳐 맞으면 어떤가? 평범한 인상이 아쉽다고?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다. 그래야 더 회사에서 여직원들을 마음껏 조종 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업무시스템으로 많은 여직원들을 조작하기 위해서는 [통솔], 다양한 섹스라이프를 즐기기 위해서는 [정력]이 정답이었다.
“[통솔]과 [정력]으로 가즈아!”
다소 뛰어나지 못한 현우의 두뇌를 업글할 수 있는 [지능] 같은 수치가 시스템에 있었다면 1픽이었겠지만 그런 건 업무시스템에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을 내리자 현우는 고민 없이 잔여포인트 한 개를 통솔에 투자한다.
[통솔 : 5/10] - new!
[중급 관리자]로 승급하면서 새로 받은 [업무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결국 [통솔] 수치는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추가로 한 명 더 [여직원] 탭에 등록이 가능하고.”
잔여포인트 2개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남겨놓기로 하고 현우는 [중급 관리자]가 되면서 새로 해금된 [근로계약]을 확인한다.
[근로계약]
1. 업무협조 - 을은 갑이 요구하는 모든 업무 관련 지시를 수행해야 한다.
2. 금품제공 (월급여 5%) - 을은 갑에게 급여의 일부를 제공해야 한다. (계약가능인원 +10)
3. 사생활 보고 - 갑은 을에게 업무와 무관한 사생활 보고를 요구할 수 있다.
4. 사적모임 - 갑은 을에게 업무와 무관한 사적모임을 요구할 수 있다. (월 가능횟수 +2)
5. 중상모략 - 대상에게 다른 직원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린다. (신뢰도 다소 높음) - new!
???(잠금)
???(잠금)
“캬아! 이거지. 이거야. 이게 왜 이제야 나왔냐.”
[중급 관리자]로 승급하면서 기존의 금품제공의 인원과 사적모임의 가능횟수가 증가했지만 현우에 눈에는 오직 다섯 번째 [근로계약]만이 눈에 들어온다.
새로 해금된 [중상모략]은 그야말로 헬조선 사내정치의 치트키와도 같았다. 아니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회사는 직원의 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는데 하루에도 수십개의 소문들이 점심식당, 티타임, 흡연실, 여직원 휴게실. 회의실 등에서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회사는 잠시도 쉬지 않는 아가리파이터들의 대환장 난투장이었다.
물론 어떤 회사를 다녀도 특정인을 비방하거나 근거도 없는 소문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러나
“그래. 우리 회사는 뒷담화가 선을 좀 많이 넘었지.”
현우가 괜히 회사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아니다.
공공기관이 하는 대민업무의 특성상 뚜렷한 성과나 실적으로 사람을 평가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승진을 판단하는 주된 항목이 사내에서의 평판이나 인맥이다. 공무원들 역시 인사고과를 줄 때 서로 주변 사람들을 평가한다.
결국 회사에서의 승진은
‘걔는 어때?’ ‘아 평판이 괜찮던데요?’ ‘그럼 그 사람으로 하지.’
라는 근본 없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구라 같다고? 지금 21세기라고? 놀랍게도 사실이다.
이런 병신 같은 승진체계는 결국 온갖 비방과 소문들이 끊이질 않는 아름다운(?) 사내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중상모략]만 있다면 회사 내에서 현우가 원하는 대로 여론을 조성할 수 있다. 즉 누구 한명 병신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히틀러 옆에서 온갖 선동질을 했던 괴벨스조차 명함도 내밀지 못하리라.
“좋아좋아. 멘탈을 아주 가루가 되게 갈아버릴 수 있겠군.”
여직원의 [심리 메시지] 조작을 위해서는 결국 [멘탈]을 최저치까지 깎아야 하기 때문에 [중상모략]은 아주아주아주 쓸만한 [근로계약]이다.
“이거만 있으면 새로운 [업무지시] 따위는 껌이지.”
[중급 관리자]로 승급, 잔여포인트, 새로운 [근로계약]까지. 연이은 보상 덕분에 자신감이 급상승한 현우.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지금 당장 공략할 여직원을 고르기 위해 [관리자] 항목에서 여직원만 검색한다.
“음...”
“흐음...”
“어라...?”
“...”
한명 한명 여직원들의 매력수치를 살피는 현우. 그러나 자신감 넘치던 얼굴은 점차 흙빛으로 변해간다.
- 탁!
그리고 계속해서 여직원 명단을 살피던 현우는 신경질적으로 스마트폰을 침대로 집어던진다.
“씨이바알!”
“이거 완전 버그 좆망껨 아니야?”
급기야 욕설까지 내뱉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
그렇다.
현우의 회사에는 [매력] 수치 8이상의 여직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 * *
“시발시발시발....”
“버그좆망겜...좆망좆망....”
“파면파면파멸파멸 파멸이다아~”
“아하하하 이제 3개월 뒤에 자유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사는 퇴사에 대한 꿈. 현우에게는 그 꿈이 이제 3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야. 이거 어떻게 깨라고?”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업무시스템에게 묻는다.
그러나 좀 전까지만 해도 얄밉게 조잘거리던 메시지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 상황이 현우는 마치 꿈같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업보스택이 이렇게 터지나? 역시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 이렇게 천벌을 받다니. 권선징악이야 권선징악’
“착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 해봐도 늦었겠지?”
김혜리의 처녀개통을 좀 미뤘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처녀상태로 공략했다면? 혜리는 유일한 업무시스템 내에 존재했던 매력 8에 여직원 이었다. 물론 지금은 명백한 과거형이 되어 버렸지만.
아니다. 애초에 업무시스템을 몰랐으면 어땠을까? 그냥 퇴근 후에 적당히 야동이나 보면서 오른손양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다른 회사로 이직을 알아봐야 하나? 내년이면 서른인데 공돌이가 아닌 문돌이를 받아 줄 호구 같은 기업이 있을까?
- 꿀꺽꿀걸
“하아”
충격으로 정신줄을 놓아버렸던 현우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벌컥벌컥 찬물을 마신다. 그제야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그는 실패 시 파면이라는 무시무시한 [업무지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기 시작한다.
“인사팀 김지영에게 무조건 이쁜 여자만 뽑으라고 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외모보고 뽑다가는 다음날 신문 1면에 대서특필감이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신입사원을 뽑을 수도 없다. 공정채용이니 어쩌니 해대면서 채용공고만 한 달을 올려놔야 한다.
“인턴을 수백명씩 뽑는거야. 한명은 걸리지 않을까?”
인턴 역시 가능성이 희박하다. 또 다시 말하지만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인턴 역시 채용 절차가 다 있고, 이력서에 사진은커녕 남/녀 구분도 없애는 판에 어떻게 매력 8의 여자를 뽑는단 말인가.
“매력 8이면 서진아, 은설, 김혜리보다 무조건 더 이쁠텐데 준 연예인 급은 돼야하지 않을까?”
“그런 여자를 어떻게 회사에 집어넣지? 그것도 3개월 안에?”
몇 시간이나 침대에 앉아서 주절주절거리며 방법을 찾아보지만 현우의 머리로는 현실성 있는 그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그가 선택한 방법은.
* * *
- 서진아 내가 분명히 니 남편에게 문신을 보여주고 그 반응을 찍어서 보내라고 했을텐데?
- 요즘 매일 남편이 출장을 가서요. 내일 집에 오니 그때 꼭...
- 내일까지야. 그때까지 안 보내면 병주가 있던없던 신혼집으로 쳐들어간다. 알겠어?
- 네에...
현우가 서진아의 등판에 음탕한 날개모양의 문신을 새긴 뒤 지시했던 명령.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도 동영상을 보내지 않은 것을 깨달은 그는 당장에 그녀에게 메신저를 보내 협박한다.
그렇다.
퀘스트를 깰 수 없다면 게임오버가 될 때까지 게임 안에서 그냥 즐기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 마지막 3개월을 즐기자. 평생에 이럴 기회가 또 있을 리 없지. 못해볼걸 다 해보는 거야. 하하하하하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자 모드가 되어버린 현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