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검정 뿔테안경을 손으로 살짝 쓸어 올리며 최고은은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팀원 한명 한명과 마주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여러분은 아마 이 회사에 입사하면서 공공기관에 대한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정년까지 보장된 근로계약, 적당한 업무강도, 공무원보다 높고 매년 물가상승분만큼 오르는 연봉.”
“그러나 그런 환상들을 이젠 버려야 합니다.”
“작년에도 2개의 공기업이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기관과 흡수되었고, 현재 회사의 수익 모델도 매년 악화되고 있습니다.”
- 꿀꺽
가볍지 않은 주제에 팀원들의 얼굴이 무거워진다.
“결국 변화하는 환경에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공공기관이라는 지휘가 회사의 미래를 보장 할 수 없다는 거죠. 물론 경영진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시작은 바로 조직혁신TF팀이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관행적이고 낡은 조직부터 완전히 바뀌어야 회사의 미래도, 신사업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 막중한 역할이 저에게 적지 않은 부담감을 주지만 저와 여러분이 최선을 다한다면 불가능한 과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그렇게 하지만 최고은의 얼굴에서 긴장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 이 자리를 기다렸다는 듯 한 기대감과 자신감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야망으로 가득 찬 여성의 얼굴은 꽤나 아름다웠다.
‘원래 이뻐서 그런 거겠지.’
팀장 최고은의 인상적인 연설에 현우 역시 아주 오래전에 죽어버린 열정이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역시 신입사원 때 최고은처럼 야망이 있었다. 물론 폐급 같은 팀원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완전히 잊었었지만.
‘말도 꽤나 잘하잖아?’
언변까지 외모만큼이나 뛰어난 최고은. 그런 그녀의 리더쉽이 현우는 조금 아주 조금 멋있었다. 이어지는 최고은의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박주임님.”
“네 팀장님.”
“박주임이 조직팀에 있을 때 기획한 전년도 조직개편 제안서는 아주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비록 최종적으로 경영진에서 받아드리지 않았지만 조직과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박주임의 통찰력이 느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권대리님.”
“넵.”
“3년 연속으로 예산팀에서 중장기 자금계획 등을 수립하며 회사의 예산에 대해서는 가장 전문가라고 들었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팀장님. 하하하”
“그리고 정과장님. 전략팀에서 중장기 전략 및 경영계획 수립을 담당하셨죠? 조직혁신TF팀에 이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요?”
“감사해요. 팀장님.”
“마지막으로 이현우씨는 음... 사실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어요. 입사 후 경영지원팀에서만 근무. 특별한 실적이나 성과도 전무. 그에 비해 직원들 사이에서는 꽤나 평판이 좋더군요. 그 때문에 마지막까지 고민하긴 했지만 그 사내에서의 평판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네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이현우씨. 그러셔야 할거에요.”
현우의 열정적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최고은의 반응은 시원찮기만 하다.
[사용자 : 최고은]
[심리 메시지]
능력 없는 직원에 대한 [업신]
그녀의 심리 메시지처럼 별다른 능력이 없는 현우에 대해 최고은이 좋은 평가를 내릴 리가 없었다. 물론 그 가슴사건도 있었고 말이다.
‘하아... 진짜 거지같네.’
첫인상부터 완전히 꼬여버린 최고은과의 관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 같은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공략한단 말인가. 가슴이 막막해지는 현우였다.
“어쨌든 여러분 모두 제 기준에 최고의 직원들이라고 생각해서 선발한 것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 힐끔
물론 현우는 예외라는 듯 최고은은 은근히 무시하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분명 어느 부서보다 바쁘고 힘들고, 누구도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은 업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야근도 많을 테고, 주말출근도 밥 먹듯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 확실히 보장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향후 여러분은 1순위 승진대상자 명단에 올라갈 것이며, 교육이나 원하는 부서로 전보에서 언제나 최우선 순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고생에 대한 보상은 걱정하지 마세요.”
- 와아아아
- 짝짝짝짝
힘들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겠다는 최고은의 말에 팀원들은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팀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현우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최고은은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 * *
- 삐리리리리
- 우우우웅 우우우웅
전화기, 핸드폰 가릴 것 없이 미친 듯이 울려대는 사무실. 전쟁이라도 난 듯 정신 차릴 틈이 없다.
“네 조직혁신TF팀 입니다.”
“네 본부장님 오전 중으로 자료 취합해서 추가보고 드리겠습니다.”
“현우씨!”
“네 팀장님.”
“아까 이야기 했던 자료조사 아직이에요?”
‘니가 시킨 지 30분도 안 지났다. 개년아!’
“곧바로 볼 수 있게 드리겠습니다.”
“빨리. 빨리 좀 가져와요. 아 박주임님. 타기관 현황조사 자료 다 됐나요?”
“넵 팀장님 여기 있습니다.”
“네 책상에 두세요. 확인 할게요.”
현우를 닦달하던 최고은은 박혜수 주임이 작성한 현황조사서를 꼼꼼하게 읽기 시작한다.
“박주임님 정리 깔끔하게 잘 했네요. 이건 보고서에 바로 인용해도 문제없겠어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박주임은 최고은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로 복귀한다.
“이현우씨 아직이에요?”
“네 지금 다 됐습니다.”
여전히 직급을 부르지 않고 ~씨 거리며 자신을 무시하는 최고은의 말투가 거슬렸지만 현우는 꾹 참고 작성한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낸다.
“으음...”
현우가 건낸 보고서를 신중하게 살피는 최고은. 그러나 이내 잔주름 하나 없는 깨끗한 그녀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한다.
“이현우씨 이게 지금 완성된 보고서인가요?”
“...네?”
“글자크기부터 자간, 디자인까지. 전부 엉망이에요. 내용은 말할 가치조차 없네요. 현우씨 여긴 학교가 아니에요. 제가 하나하나 처음부터 앉혀놓고 가르쳐 드려야 할까요?”
“,,,”
딜 미터기 터져버릴 정도로 극딜이 날아온다. 직설적이다 못해 모욕적이기까지 한 최고은의 말에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꽈악 힘이 들어간다.
- 턱
“눈이 있으면 박주임의 보고서 좀 본인 것과 비교해 보시죠.”
최고은 역시 화가 났는지 거칠게 박주임이 방금 작성한 자료를 현우에게 던지듯 건낸다.
‘그래 한번 보자 얼마나 잘 썼는지 잘.... 썼구나...시발’
자신의 보고서와는 분명 비교되는 퀄리티였다. 잘 정돈된 도표와 간결한 문구가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보고서의 내용을 할 수 있게 했다. 잘 쓴 보고서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가독성 뛰어난 것이라고 했던가? 거기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보고서였다.
“...”
덕분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현우.
“다시 해서 가져와요. 이현우씨.”
최고은의 싸늘한 말이 비수처럼 박힌다.
* * *
“하아...”
“커피 한잔하면서 머리 좀 식혀요 이대리님.”
“아아... 감사합니다.
예산팀에서 근무하다가 TF팀으로 넘어온 권용찬 대리는 팀장에게 무참하게 깨진 현우에게 자판기 커피를 건낸다.
“요즘 많이 힘들죠?”
“하하...”
“이대리님 너무 상심 말아요. 최 팀장님 원래 저런 스타일로 유명하잖아요. 예산팀도 충분히 빡센 부서라고 생각했는데 여긴 정말 다른 부서는 애들 장난처럼 느껴지네요.”
권용찬 대리는 애써 웃음 지으며 현우를 위로한다. 웃을 때 눈이 완전히 사라질 정로도 작은 눈이었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비열해보이기 보다는 꽤나 편안함을 주는 느낌이었다.
“권대리님은 어쩌다가 최팀장님 밑으로 오신거에요?”
“아 전 저기 수도권에서 근무하는 아내와 주말부부 중이거든요. 근데 이게 처음에는 엄청 좋았는데 매주 올라가는 것도 진짜 쉽지 않습니다. 어째 주말이 일하는 평일보다 더 힘들다니까요?”
본사가 지방 시골에 있는 탓에 강제로 아내와 이별하게 된 권대리는 아마도 다음 전보시즌에 수도권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수도권은 자리도 별로 없고 경쟁도 세지 않나요?”
“그렇죠. 근데 최팀장님이 확실하게 말씀하셨으니까 그 말을 믿어야죠. 하하하. 그러니 우리 조금만 버텨봅시다.”
“감사합니다. 권대리님.”
“먼저 들어갈께요. 좀 쉬다 와요.”
그래도 괜찮은 팀원들 덕분에 조금은 힘이 나는 현우였다.
‘그래도 팀원 복은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업무시스템으로 최고은과 팀원들의 심리 메시지를 살핀 현우는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용자 : 최고은]
[심리 메시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
회사의 성공적인 혁신에 [기대감]
팀 리더로서의 [자신감]
능력 없는 직원에 대한 [업신]
자신감 없는 이성에 대한 [경멸]
완벽하신 팀장님의 상태는 처음이나 지금까지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용자 : 박혜수]
[사용자 : 권용찬]
[사용자 : 정민영]
팀원들에게 나타난 심리메시지는
‘다행이야 모자란 사람이 하나 있어서.’
‘니가 갈굼 당해야 내가 안당하지.’
‘제발 나까지 불똥 튀지 않게 몸빵 ‘해줘’ ‘해줘’
대충 이런 의미였다.
겉으로는 최고은에게 깨지는 현우를 안타깝다는 듯이 위로했지만 결국 그 덕분에 자신이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계속 당해줘라. 였다.
“와아... 이 개새끼들 보소.”
업무능력과 인성은 정비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업무시스템이 없었다면 사람 좋은 척하는 팀원들의 뻔뻔한 위로에 그대로 당할 뻔했다. 현우는 새삼 직장에서는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 시발 아무리 지랄해봐야 내가 몇 달도 못 버티겠어? 내가 어! 원래 팀에서는 3인분 업무를 혼자 했던 사람이야.’
타협이라곤 1도 없는 완벽주의자 최고은 팀장과 음침한 속내의 팀원들. 자존심 때문이라도 현우는 절대 낙오할 마음이 없었다.
* * *
“시발”
그러나 현우의 각오는 이내 너널너널하게 박살내버린다.
최팀장은 스케줄을 분단위로 관리하는지 실시간으로 팀원들의 업무진행 현황을 체크했다. 지시사항은 1시간 최대한 늦어도 2시간 내에 그녀의 눈에 차는 정갈하고 깔끔한, 그러면서 내용적으로도 완벽한 보고서로 제출되어야 한다.
물론 단순히 업무가 보고서 작성뿐이라면 현우가 이렇게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매일 2시간이 넘는 마라톤 회의는 물론, 회사의 거의 모든 부서의 팀장 팀원들과의 심층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리고 당연히 회의의 모든 내용이 잘 정리된 회의록 작성까지 완벽하게 수행하기를 최고은은 요구했다.
아 물론 이것도 일부에 불과했다. 선진 사례분석을 위해 수많은 사례조사. 타기업의 직원들과 스케줄 조율부터 인터뷰 질의내용, 회의록 작성까지 업무 역시 현우의 몫이였다. 하나하나 모두 그녀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었다.
그럼 팀장 최고은은 뭐하냐고?
놀랍게도 최고은은 모든 팀원이 합친 업무보다 많은 업무를 소화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모든 과업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야 그녀처럼 효율적으로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다.
CEO는 물론 외부자문위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최고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유창하게 답변을 해내곤 했다.
그렇게 현우는 최고은이 원하는 성과를 내기위해 야근과 주말출근을 밥 먹듯 해댔다. 결국 그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업무로서 그녀에게 인정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사용자 : 최고은]
[심리 메시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
회사의 성공적인 혁신에 [기대감]
팀 리더로서의 [자신감]
능력 없는 직원에 대한 [업신]
자신감 없는 이성에 대한 [경멸]
1개월이 지났건만 최고은의 심리메시지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 업무지시 (대리급)
[심리 메시지를 활용하여, 매력포인트 8 이상 여직원을 공략완료 하세요. 업무지시일로부터 3개월 안에 완수해야 합니다.]
[남은 기일 : 1개월 29일 12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