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현우는 분명 최고은의 공략에 한발 다가갔음에 기뻐해야 했다.
그러나
‘시발시발’
“현우씨 아까 이야기한 자료취합 아직이에요?”
“10분만... 아니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현우뿐만이 아니다. 조직혁신TF팀원 전부가 최고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면 재검토!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직장인에게는 지옥 같은 단어였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차곡차곡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쌓은 결과물을 와르르 엎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 잘 키운 캐릭터를 삭제하고 다시 1레벨부터 키우는 것. 그것이 ‘전면 재검토’가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다시 캐릭터를 키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
원래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 문제점과 보완책을 찾아가며 진행시켜야 하기 때문에 2트는 1트보다 훨씬 어렵다. 혹시라도 3트까지 가게 된다면 그 다음은... 상상하기도 싫다.
그래서 결재는 한 번에 받는 것이 최선이다. 한번 퇴짜를 맞는 순간 난이도는 제곱으로 뛴다.
현우를 비롯한 모든 팀원들도 모두 기획안이나 보고서를 작성해 본 경험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힐끔
물 한잔 마실 여유도 없는 분주한 상황에서 현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최고은을 살핀다.
반듯하게 빗어 넘긴 올림머리와 100일 휴가 나온 이등병의 전투복처럼 구김이라고는 1도 없는 각 잡힌 정장. 검정색 뿔테 안경 뒤로 강렬한 눈빛과 평소와는 다름없는 포커페이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최고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우는
- 톡톡톡톡
신경질적으로 문서를 두들기는 그녀의 손가락을 통해 최고은의 상태를 어느 정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사용자 : 최고은]
[나이 : 33] [키 :171] [체중 : 61]
[체력 : 9/10] [매력 : 9(+1)/10] [성욕 : 2/10] [멘탈 : 10/10]
[만족도 : 잠금] [호감도 : 잠금]
[심리 메시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
회사의 성공적인 혁신에 [기대감]
팀 리더로서의 [자신감]
능력 없는 직원에 대한 [업신]
자신감 없는 이성에 대한 [경멸]
물론 업무시스템으로 확인한 최고은의 상태는 미동조차 없었다. 특히나 놀라운 것은 [멘탈]이었는데 최고수치여서 인지 이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현우와 나머지 팀원들이 업무에 파묻혀 갈려나갈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현우씨! 아직이에요?”
“가...갑니다. 팀장님.”
그래서 현우는 마냥 즐겁게 웃을 수 없었다.
* * *
- 쾅
‘아아... 이번에도 반려인가.’
TF팀의 권용찬 대리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결재판을 내려놓는 최고은의 모습을 보고 직감했다. 2트도 실패라고.
어제 새벽 2시까지 팀원 전체가 야근을 하며 재검토한 보고서였지만 오늘 아침 회의에서 또 다시 빠꾸 맞은 것이 분명했다.
“하아...”
‘그냥 예산팀에 있을걸.’
권대리는 그래도 최고은의 역량을 믿고 있었다. 특별승진 2회. 최연소 팀장 발령. 그녀가 담당하는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주제도 모르고 서울지사로 발령받고 싶다는 욕심을 버렸어야 했다.
오늘도 야근이 확정된 권대리의 푸념이었다.
“여러분... 보고서는 보완, 수정을 해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허스키하고 똑 부려졌지만 주름하나 없던 최고은의 이마는 살짝 구겨져 있었다.
* * *
- 꽈앙
흠칫
이번에는 옆 부서 직원들까지 깜짝 놀라 쳐다볼 정도로 거칠게 책상 위로 내팽개쳐진 결재판.
- 우수수
결재판 안쪽에 서류뭉치가 마구 흩날리듯 바닥에 떨어진다.
“오늘은... 모두 일찍 퇴근하세요.”
꽈악 입술을 깨물며 화를 참아낸 최고은은 팀원들을 모두 퇴근시킨다. 2주 동안 새벽까지 야근행군을 해온 현우를 비롯한 팀원들은 내심 살았다는 기쁜 마음이었지만
‘히익’
살짝만 건드려도 폭탄처럼 터져버릴 것만 같은 팀장의 모습에 모두 살금살금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하아...”
부하직원들 앞에서는 절대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말자고 다짐한 최고은은 팀원들이 모두 퇴근하자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CEO에게 본부장과 팀장들이 자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최고은은 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수차례 노력을 했다.
한명 한명 찾아가 면담과 설득. 간담회까지 개최해가며 그들의 의견을 듣고 보고서에 반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늘 보고에서 CEO의 대답은 달라진 게 없었다. 정확히는 달리지지 않은 건 본부장, 팀장들이었다. 이번이 3번째 반려였다.
- 꽈악
마음 같아서는 그들에 얼굴에 보고서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최고은은 애꿎은 연필만 꺾어버릴 듯 꽉 움켜쥔다.
2번째 퇴짜까지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의 능력부족으로 회사 구성원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3번째 퇴짜를 맞고 나니 업무능력과는 관계없이 자신을 음해하고 무너트리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든다.
‘내가 여자라서? 아니면 너무 어려서?’
분명 최고은은 동기들이나 선배들과 비교해도 이례적인 승진을 해왔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승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운이나 인맥, 라인 따위의 편법이 아니라 순수하게 실적으로 일궈낸 결과였기 때문이다.
‘2배 연봉 제안도 뿌리치고 왔건만’
외국계 기업에서 그녀에게 제안한 파격적인 조건. 단호하게 그 제안은 거절 할 수 있었던 것도 조직에 대한 최고은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든 일이라고 만류하는 주변에 조언에도 불구하고 조직혁신TF팀을 받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라면 회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바꿀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감이 와장창 무너짐을 느낀다.
‘부사장인가?’
원래부터 노골적인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언제나 무시했었다. 그러나 최근 프로젝트 관련 부가설명을 위해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 어이쿠. 최팀장 여기 뭐가 묻었네. 칠칠맞게 허허허...
보고하는 최고은의 스커트 위에 슬쩍 손을 올리는 부사장. 마치 허벅지에 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불쾌한 감촉에
탁
- 얼룩이 묻었다면 제가 나중에 닦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확실하고 단호하게 그 더러운 손을 쳐내버렸다.
‘그때 그것 때문에?’
단순히 부사장만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간담회에서 느꼈던 자신을 향한 탐탁치 못한 표정들.
왜 이제 와서 자신을 향해 반감을 드러내는지 최고은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 미혼의 여자, 눈에 띄는 몸매 때문에 받은 음흉한 시선들과 성희롱, 실적을 가로채가는 선배들. 이 모든 장애물을 뛰어난 실적과 결과물로 물리치며 올라온 최고은.
덕분에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평판이나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은 실적과 결과로 증명하는 것이 직장인 아닌가?
‘확실하고 명확한 결과물이 앞에 있는데 단지 내가 싫다는 이유 하나로 거부하는 거야?’
회사의 변화가 필요한 상황에서 해결책이 여기 이 보고서에 있는데, 다른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저 자신에 대한 불만만을 드러내는 관리자들.
항상 업무능력으로 모든 것을 돌파해온 최고은은 밤늦게까지 고민해 보지만 처음 겪는 이 낮선 장애물에 도무지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 * *
“이대리님 요즘 진짜 사무실 분위기 살벌하죠? 으...”
평소 능글능글한 웃음을 잃지 않는 권용찬 대리. 그 역시도 컨디션 최저 그 자체인 최고은 때문에 잔뜩 눈치를 보고 있다.
“후우... 그러게요. 정확히 뭔 일이에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아드린 현우는 최고은이 겪고 있는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묻는다.
“확실한건 프로젝트 자체의 문제가 아니란 겁니다. 즉 보고서를 만든 팀원들의 잘못은 없다는 거죠 하하하... 다만 뭔가 위쪽에 밉보인 거 같아요. 우리 팀장님.”
“그래요? 그렇게 밀어주려고 특별승진까지 시키면서 데려온 거 아니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쯧쯧... 저렇게 자존심 강한 분이 융통성을 발휘할거 같지도 않고... 뚝 부러질까 걱정이에요.”
최고은도 걱정이지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서울로 발령 나야 하는데 권대리는 그것이 더 걱정이었다.
“뭐 잘 해결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회사 최고의 인재인데.”
“후우... 그래요 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나요? 믿어봐야죠.”
짧은 담배탐을 마치고 두 사람은 사무실로 복귀한다.
‘슬슬 구원투수로 등판해 볼까?’
현우가 뿌린 [중상모략]이 최고은을 압박하고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지만 몇 차례 더 퇴짜 맞은 그녀의 보고서. 현우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는 최고은에게 다가간다.
“팀장님.”
“네 현우씨. 말씀하세요.”
현우의 부름에도 서류에서 얼굴조차 들지 않는 최고은. 여전히 직책도 생략하고 -씨 거리는 게 짜증났지만 그녀를 따먹기 위해서 자존심 따위에 충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최근 프로젝트 보고 관련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휙
현우가 자신의 치부를 건드렸는지 얼굴을 번쩍 드는 최고은.
“그건 현우씨가 전-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강렬한 눈빛과 함께 평소보다 더 딱딱한 말투로 대답하는 그녀. 꺼지라는 소리를 완곡히 한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인데요. 윗선에 제가 한번 보고를 드려 봐도 될까요?”
“하! 뭐라구요? 현우씨가 직접 보고를 드린다구요?”
팀장인 자신조차도 연전연패중인데 고작 대리 따위가 보고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게 있을까? 니가? 딱 그런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현우를 쳐다보는 최고은.
“뭐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한번 기회를 주십쇼.”
“...그래요. 한번 해봐요.”
몇 차례나 보고서를 퇴짜 맞은 탓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최고은은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은지 결재판을 현우에게 넘긴다.
“네 감사합니다.”
그녀가 이토록 고전하는 것은 현우가 업무시스템의 [중상모략]으로 만들어낸 부정적인 평판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하면 보고서의 내용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는 말이었다.
‘문제의 원인을 알면 해결이야 간단하지.’
결재판을 손에 든 현우는 곧장 본부장실을 방문한다.
- 똑똑
“들어오세요.”
“네 안녕하십니까. 조직혁신TF팀 대리 이현우입니다.”
“오 그래요. 이대리. 무슨일인가요?”
“아 이번 프로젝트 관련해서 보고를 드리려 왔습니다.”
“아 그래요? 앉으세요.”
최고은이 보고했던 것과 글자 하나 다르지 않은 동일한 보고서를 본부장에게 내미는 현우.
“다시 검토하라는 의견을 받고 완전히 다시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그래요? 한번 볼까요?”
- 펄럭펄럭
수십장의 보고서를 휙휙 대충 넘기며 내용을 확인하는 본부장.
“으음... 음음. 보고서는 아주 좋군요. 이대리.”
“하핫...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중상모략]으로 평판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진 최고은 대신 현우가 들어가는 것만으로 본부장은 편견 없이 보고서를 읽는다. 당연히 보고서 내용 자체는 최고은이 심혈을 기울인 만큼 완벽하다.
“그래요. 이 내용이라면 문제 없겠어요. 수고했어요. 이대리.”
“넵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 철컥
“큭큭큭큭”
똑같은 보고서이지만 최고은이 들고 갔을 때는 퇴짜, 현우가 들고 갔을 때는 통과. 결국 본부장에게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었다.
‘이놈의 병신 같은 조직.’
최고은이 왜 조직혁신을 그렇게 강조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무능력한 관리자들과 비효율적인 보고.
‘보고서 내용이 바뀌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아재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니... 에휴...’
정말 답도 없는 회사였다. 그러나 그게 현우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사람 한사람 본부장, 팀장들을 찾아다니며 마치 다시 작성한 척 기존과 동일한 보고서를 결재 받았다.
“좋아요. 최팀장님. 이번 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내부적으로 조율이 된 거 같군요. 고생하셨습니다.”
- 스스슥
보고서에 시원하게 서명하는 CEO. 현우에게 보고를 맡긴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최고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결재 된 보고서를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뭐지?’
- 또각또각
당장 이현우에게 상황설명을 듣기위해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