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현우씨 잠깐 회의실로.”
“네.”
예상했던 대로 현우를 호출하는 최고은.
- 철컥
현우가 들어오자 살짝 회의실의 문을 닫는 팀장. 4인용 테이블만이 놓인 작은 회의실에 현우와 최고은은 서로를 마주보고 앉는다.
팀원으로 몇 주간 함께 일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단 둘이 마주보기는 처음이다.
- 꿀꺽
‘눈...눈깔에 힘 좀 빼지.’
반듯하게 쓴 검정 뿔테안경 뒤로 자신을 바라보는 최고은의 매서운 눈빛 때문에 현우를 그만 지릴 뻔 했다.
그러나 그런 긴장도 잠시 회의 테이블 위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최고은의 바스트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뺏긴다. 벗겨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사이즈임은 분명하다.
- 탁
현우가 바로 앞에 앉아 노골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훑어대는 탓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에 결재판을 내려놓는다.
“현우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오늘 오전 CEO 사무실로 호출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3차례나 승인받지 못했던 보고서에 결재를 받았죠.”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팀원들도 이제 야근을 안 해도 되겠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현우는 능글맞게 대답한다.
찌릿
“어떻게 된 일이죠?”
“일전에 팀장님께 보고 드린 내용 그대로입니다. 제가 직접 본부장님들과 팀장님들께 내용을 다시 설명 드렸고 결재를 받았습니다.”
마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최고은의 눈빛을 마주보며 현우는 애써 침착하게 이야기 한다.
“그게 다 인가요? 수정된 내용도 없는 보고서를 그대로 다시 들고 가서 결재를 받았다?”
“맞습니다. 제가 구두보고는 기가 막히게 하거든요. 하하하...”
‘뭐지?’
가끔 내용도 읽지 않고 서명해 주는 관리자들도 있으니까 분명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찜찜하다. 최고은이 느낀 감정이었다.
그러나 이현우를 추궁하기에도 그림이 이상하다. 분명 보고서에 승인을 받아내는 것도 능력 아니겠는가? 오히려 팀장으로서 칭찬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 어쨌든 수고했어요. 그만 나가보세요.”
“넵”
현우가 나가고서도 계속해서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하는 최고은. 몇 번을 다시 살펴보아도 바뀐 점은 없었다.
* * *
그 뒤로도 현우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아무리 최고은이 철저한 준비와 발표로 몇 시간씩 공을 들여도 윗선에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반면에 보고서만 달랑 들고 들어간 현우는 곧바로 그들의 승인을 받아냈다. 그야말로 결재 프리패스가 따로 없었다.
“하아...”
자신이 아무리 살펴봐도 평범. 아주 후하게 쳐줘야 업무능력은 중상인데 현우는 자신이 퇴짜 맞은 보고서를 단숨에 결재 받아 사무실로 돌아온다.
‘도대체 뭐지?’
최고은은 이 미스테리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팀장인 자신보다 일개 대리를 더 신뢰하는 임원들.
“하아...”
한숨을 내쉬는 직원들을 정말 싫어했는데 최근 누구보다 한숨이 많아진 최고은.
‘그래도...인정해야겠지?’
자신이 보기에는 못미더워도 결과만 놓고 따져보자면 누구보다도 가시적인 성과를 낸 현우를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최고은이었다.
* * *
[사용자 : 최고은]
[나이 : 33] [키 :171] [체중 : 61]
[체력 : 9/10] [매력 : 9(+1)/10] [성욕 : 2/10] [멘탈 : 10/10]
[만족도 : 잠금] [호감도 : 잠금]
[심리 메시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
회사의 성공적인 혁신에 [기대감]
능력 없는 직원에 대한 [업신]
자신감 없는 이성에 대한 [경멸]
팀원 이현우에 대한 [신뢰] - New!
"이~야호!”
서진아, 은설, 김혜리의 공략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 끝에 드디어 얻어낸 최고은의 심리 메시지 한줄.
역시 워커홀릭 최고은의 사람 판단기준은 업무능력이었다. 그녀가 승인받지 못한 보고서를 척척 해결했던 현우.
아무리 그녀가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해도 그 성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최고은은 누구보다도 공과 사는 칼같이 구분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호감]이나 [애정]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뭐 [신뢰]도 어디냐.’
애초에 [호감]이나 [애정]과 같은 연애감정을 얻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다. 당장에 [신뢰]도 공략에서 없는 것 보다는 낫다.
‘팀 리더로서의 [자신감]은 사라졌네?’
현우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해서였을까? ‘팀 리더로서의 [자신감]은 현우에 대한 [신뢰]로 대체되었다. 현우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그 감정을 증폭시킨다.
팀원 이현우에 대한 [신뢰] - 증폭 활성화(New!)
역시 업무시스템의 효과는 절대적인지 곧바로 반응이 나타났다.
“이대리님. 잠시만요.”
‘오오오’
무시하듯 -씨로 자신을 부르던 최고은이 이제 직책을 붙여 자신을 부른다. 어느 정도 이제 현우를 자신의 팀원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일까? 분명한 것은 긍정적인 변화였다.
“곧바로 월례회의에서 보고할 자료인데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말해줘요.”
“넵 알겠습니다.”
업무 역시 단순 자료취합이나 허드렛일에서 이제는 꽤나 중요한 업무를 맡긴다.
‘큭큭큭 그래. 이거지. 나 이현우야.’
관리자 권한을 얻기 전에도 꽤나 업무부심이 있었던 현우는 드디어 자신이 최고은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업무능력이 뛰어났다기보다는 최고은이 [중상모략]으로 윗선에 완전히 찍힌 것이 결정적이었다. 사실 임원들 입장에서는 현우가 아니어도 최고은을 제외한 누구라도 보고서를 들고 왔다면 승인을 해 줬을 것이다.
뭐 팩트야 어떠하든 현우의 자신감은 배가 되었고, 이제는 [신뢰]도 얻었겠다 본격적으로 그녀를 공약할 최소한의 환경이 갖추어 졌다.
* * *
“박주임님 잠시만요.”
“네 이대리님.”
사무실에 박혜수 주임 혼자만 있음을 확인한 현우는 그녀에게 접근한다.
“다름이 아니라 내일 팀장님과 둘이 서울출장 가시죠?”
“네 맞아요.”
“그 출장 제가 대신 갈게요. 대신 사무실에서 월례보고 자료 좀 검토 해주세요.”
“네? 하지만 분명 팀장님께서 직접 제게 지시하셨는데요?”
“아 방금 팀장님께서 저랑 바꾸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이상한데... 제가 다시 여쭤보고 말씀드릴게요.”
‘하아...의심 많은 년’
최고은과 단 둘이 출장을 가기위한 현우의 계획은 첫 스텝부터 삐그덕 거린다. 그러나 박주임의 이 정도 반응은 충분히 그의 계산범위 내에 있었다.
‘아 지금은 하나하나가 아까운데... 어쩔 수 없지.’
현우는 업무시스템의 근로계약 중 [업무협조]를 박주임에게 사용한다.
[근로계약서 1개가 소모됩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박주임님. 이번 출장은 제가 대신 가게 되었습니다.”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이대리님.”
[업무협조]를 사용하자 박주임은 의심가득한 눈초리를 거두고 곧바로 현우의 지시를 따른다.
[업무협조 - 을은 갑이 요구하는 업무 관련 지시를 수행해야 한다.]
업무 관련 지시 한정이긴 하지만 이럴 땐 꽤나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는 [근로계약]이다. 근로 계약서도 1개 소모이면 나름 혜자스럽다.
현우가 만약 팀장급정도만 되어도 활용도가 무궁무진하겠지만 일게 대리가 다른 직원들에게 지시할 수 있는 일은 현재로서는 많지 않다. 아무튼 지금은 출장을 핑계로 최고은과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흐흐흐’
그녀와 단둘이 보낼 시간에 현우는 벌써 온갖 망상을 머릿속에서 펼친다.
“그래서 제가 출장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잘 됐군요. 원래는 기차를 이용 할 생각이었는데 이대리 운전면허 있죠?”
“어... 당연히 있죠. 팀장님.”
“그럼 회사차량으로 이동합시다.”
“아...넵.”
그러나 뭔가 현우의 기대와 어긋나기 시작하는 출장. 분명 박주임에게 확인했을 때는 기차로 이동하는 여유로운 스케줄이었는데 최고은은 시작부터 계획을 바꾼다.
- 부우웅
최고은을 조수석에 태우고 차량을 출발하는 현우.
‘첫 번째 목적지 200km... 두 번째 목적지 150km... 세 번째는...’
갑자기 운전기사가 되어버린 현우. 네비게이션에 찍힌 수많은 경유지와 이동거리를 보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런 현우의 기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최고은은
- 촤락
단 한마디의 대화도 거부하겠다는 듯 서류에 빨려 들어갈 기세로 완전히 업무에 집중해 있다.
‘하아’
그렇게 완전한 침묵 속에서 현우는 하루종일 운전대만을 잡아야 했다.
“으아아아”
- 털썩
출장 첫날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 침대에 기절하듯 쓰러져 버린 현우. 점심시간까지 건너 뛰며 운전과 업체 미팅을 병행한 탓에 그야말로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아 원래는 저녁 때 소주도 한잔하고... [호감도]를 쌓으려고 했는데.’
- 고생했어요. 내일 7시에 로비에서 출발하죠.
쾅
무표정한 얼굴로 할 말만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 최고은. 뭐라고 한마디 할 힘도 없는 현우 역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안되는...데...”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출장. 뭔가 그녀와 이벤트가 필요한 현우였지만 이내 기절하듯 잠에 빠져버린다.
다음날도 첫날과 전혀 양상은 바뀌지 않았다. 운전만하는 현우와 조수석에서 업무에 몰두하는 최고은. 네비에 찍힌 수백킬로의 이동거리.
“오늘의 일정은 5개 기관의 담당자들과의 미팅입니다.”
‘시발’
현우는 최고은이 준 출장 계획서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박주임에게 썼던 [업무협조]를 최고은에게도 써서 일정을 조정하고 싶은 현우였지만, [중상모략]에 사용하는 바람에 근로계약서를 전부 사용해버렸다.
어제 사용했던 1개 역시 간신히 예비용으로 전날 밤 은설의 오피스텔에서 뒹굴며 얻은 것이었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평범한 섹스로는 하룻밤에 1개 이상의 계약서를 얻기 힘들다.
결국 현우는 꼼짝없이 오늘도 지옥 같은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 부르릉
“후우...”
‘아 개졸리네 진짜.’
졸음껌에 허벅지를 마구 꼬집어보지만 어제부터 10시간 이상 운전을 해서인지 현우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운전대를 잡고 있다.
목적지까지 거리를 네비게이션을 확인해보지만 아직 한참이나 남은 상황. 줄어들지 않는 거리와 쏟아지는 졸음.
“...”
“이대리! 정신차려요!”
‘헉’
- 끼이익!
“하아하아...”
최고은의 날카로운 외침에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은 현우. 하마터면 앞차와 그대로 충돌할 뻔했다.
“허억허억...”
“죄송합니다. 팀장님... 좀 피곤해서 그런데 잠시 쉬었다가 가도 될까요?”
최고은도 생각해보니 너무 일정이 가혹했다고 느꼈는지 질책을 하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갓길에 차량을 주차하고 그대로 운전석에서 기절하듯 눈을 붙이는 현우.
그런 현우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최고은은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린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이대리! 이제 출발해야해요. 벌써 한시간이나...”
최고은은 손으로 어깨까지 흔들면서 깨워보지만 피로가 축적되었는지 현우는 정신차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늦겠는데...”
약속에 늦는다는 것. 완벽주의자 최고은에게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일어나서도 안된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와 약속시간을 확인하는 최고은. 지금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하다가는 제 시간에 도착하기 힘들다.
‘어쩔 수 없나’
“제가 운전할께요. 뒷자리로 가요. 이대리.”
“으음...”
잠에서 깰 생각을 하지 않는 이현우를 간신히 뒷좌석으로 보낸 최고은은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해외파견 후 한국에서는 처음하는 운전이었지만 크게 문제는 없으리라.
“후우...”
- 부우웅
현우와 최고은이 탄 차량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 * *
“으으음...”
얼마나 잤을까? 한 시간? 아니면 두 시간?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됐는지 현우는 잠에서 깨어난다.
‘팀장님이 직접 운전을 했나?’
얼마나 잤는지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아니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진 시간.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무성한 수풀. 분명 마지막에 자신이 세워둔 갓길은 아니었다.
‘여긴 어디지? 산,,, 인가?’
“팀장님 여긴 어디...죠?”
운전석에 앉은 최고은에게 묻는 현우. 그러나
“...”
팀장은 멍하니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앞쪽에는 바위 때문에 길이 완전히 막혀있었고, 차량엔 시동이 꺼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