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어떻게 된 거죠? 팀장님?”
“...”
“팀장님!”
“그...그러니까...”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하는 최고은. 언제나 당당했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말조차 더듬거린다. 최고은이 더듬거리는 모습이라니...오늘 이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아마 평생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대리가 일어나지 않아서 운전을 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아니 어떻게 길을 잘못 오면 이런 산골까지 오는거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현우는 일단
“일단 제가 운전할께요 팀장님.”
최고은을 조수석에 앉히고 자신이 운전석에 앉는다.
“어... 그게...”
차량 계기판에 들어온 주유 경고등.
‘설마...’
현우가 시동을 걸어보지만 이미 완전히 퍼져버린 차.
“기름이... 다 떨어졌나봐요.”
‘하아...’
“혹시 팀장님 운전을 한 게 마지막으로 언제죠?”
“해외파견 전에 한번... 했었는데 오랜만에 해서 그래요. 오해...말아요 이대리. 흠...흠”
최고은은 더듬거리며 변명하지만 현우는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여자... 운전은 완전 꽝이구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회사 내에서 완벽한 이미지인 덕분인지 현우가 생각하는 최고은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이었다. 아마 다른 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러나 당연히도 완벽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었고 최고은 역시 재능이 없는 영역이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로 못할 수가 있나?’
분명 고속도로였는데 이런 산 속까지 차를 끌고 오다니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운전도 서투시면서 왜 고집부리셨어요?”
“...”
직장생홯을 하면서 자신이 이렇게 질책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최고은은 현우의 질책이 분한지 아니면 성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운전도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인 채 얼굴만 붉힌다.
“...이대리 때문이야. 약속시간도 촉박했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사무실에서는 독재자처럼 군림해온 호랑이가 어느새 고양이가 되어 버렸는지 속삭이듯 혼잣말을 내뱉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귀엽네. 연상주제에...’
조금은 귀여운 현우였다. 170에 큰 신장과 비현실적인 굴곡의 가슴. 포커페이스로 무장한 최고은이었지만 결국 그녀도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내...내가 저지른 일은 내가 수습할 테니까 이대리는 신경 쓰지마세요.”
그래도 최고은은 일을 저질러 놓고 ‘오또케 오또케’ 거리는 여자들과는 비교할 가치도 없는 책임감 있는 커리어우먼이었고 곧바로 업무용 차량에 있던 긴급상황 매뉴얼을 꺼내 절차대로 우선 보험사에 전화를 한다.
“네 귀사의 자동차보험에 가입된 법인차량이구요. 차량번호 0000입니다. 네 맞아요, 자금 연료 부족으로 차량 시동이 걸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비상출동 서비스를 요청 드립니다.”
그래도 보험회사와는 이야기가 잘 됐는지 최고은의 얼굴에는 이내 안도감이 드러난다.
“장소는 어,,, 여기가... 흥천군 금촌면이라고 네비에는 나오는데요. 산이라 그런지 더 자세한 위치정보는 없네요. 길이 끊겨 있고 주변엔 가로수나 전신주도 없네요.”
“아...네... 알겠습니다. 좀 기다려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하아...”
“팀장님 보험사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일단은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서 찾아오는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일단은... 좀 기다려야 할 거 같네요.
“그렇군요...”
“저... 이대리 미안해요. 저 때문에 곤란하게 됐네요.”
자신의 잘못은 바로 인정하는 최고은. 역시 옳고 그름은 확실하게 하는 그녀의 성격답다고나 할까.
“괜찮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하하하...”
“...”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운전 실력을 들켜서 민망한지 최고은은 더 이상 말이 없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곧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시동조차 걸리지 않아 차량 안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산 속이라 그런지 주변에는 그 흔한 가로등조차 없었고
‘진짜 보험회사에서 못 찾아오면 이거 조난당하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경찰에 전화를 해?’
현우도 약간은 불안감이 느껴진다. 회사에서는 관리자 권한으로 직원들의 머리 위에 있지만 사실 회사라는 공간을 벗어나면 그 역시 평범한 직장인 중 한명에 불과하다.
“일단은 보험회사에서 올 때까지 기다려보죠. 어두워서 괜히 움직이면 위험할 수도 있구요.”
그렇다고 경찰이나 119에 불렀다가는 일이 커진다. 나중에 회사에 확인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고 현우는 생각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차량 안에서 현우와 최고은은 꼼짝없이 보험사의 긴급호출 차량을 기다려야만 했다.
* * *
그러나 몇 시간을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는 보험사의 차. 최고은이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더 전화를 해 봤지만 위치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주변을 확인중이라는 답변뿐이었다.
엔진의 잔열까지 식으면서 산 속의 추위가 차량 안까지 침입한다.
“하아...”
추위를 느끼는지 최고은의 몸은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바로 옆자리에 앉은 현우에게 까지 느껴질 정도.
‘얇은 정장만 걸쳤으니...’
아무리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 최고은이라도 출장 중에 이렇게 산 속에서 조난당하는 일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평소와 같은 가벼운 정장차림이었고, 그것은 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
그 역시도 입가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으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우는 차량 곳곳을 뒤져봤지만 업무용차량에는 차량운전일지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 얼어 죽겠다. 뭔가 체온을 높일 만한게...‘
물론 현우의 머리에 떠오른 건 당연히 섹스밖에 없었다. 서로의 살과 살이 뒤엉키며, 거칠게 서로의 몸을 탐하는 두 남녀. 실제로도 산속에 조난당한 등산객들이 성교를 통해 체온을 유지하며 버텼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용자 : 최고은]
[심리 메시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
회사의 성공적인 혁신에 [기대감]
능력 없는 직원에 대한 [업신]
자신감 없는 이성에 대한 [경멸]
팀원 이현우에 대한 [신뢰] - 증폭 활성화
팀원 이현우에 대한 [미안함] - New!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우는 최고은의 상태창을 확인해본다. 그러나 추가된 것은 현우에 대한 [미안함] 정도.
‘그렇게 미안하면 한번 대줘. 체온도 올리고 좋잖아? 라고 말하면 좃대겠지?’
조수석에서 떨고 있는 최고은을 힐끗 쳐다본 현우는 일단 그 자신에 대한 [미안함]을 증폭시킨다. 마음의 빚을 하나 만들어 두는 것도 그녀의 공략에는 꽤나 큰 무기가 될 것이다.
“괜찮으세요? 팀장님?”
”네... 전 신경쓰지마세요.“
’덜덜 떠는 게 여기까지 느껴지는데 무슨...‘
그것은 최고은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어린 나이와 여성이라는 성별, 그녀가 팀장까지 올라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두 가지 약점을 완전히 숨김으로써 가능했던 일이었다.
약한 모습도, 힘든 모습도 완전히 숨기는 것.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 누구보다 빠르게 팀장까지 승진한 최고은의 비결이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는데...‘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무턱대고 견디는 게 능사가 아니다. 여기는 회사가 아니었고, 무식하게 버티다간 정말 저체온증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현우조차도 버티기 힘든데 여자인 최고은은 오죽할까?
“팀장님”
“으으... 왜요? 이대리.”
“그냥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다가는 저체온증이 올지 몰라요.”
“괜...괜찮아요. 조금만 있으면 보험회사에서 올꺼에요.”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인지 최고은은 항상 그래왔듯 스스로 이 상황을 극복해내려 한다.
“진짜 괜찮아요? 팀장님?”
“아 정말! 저 괜찮다구요!”
‘하아...’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저... 아까부터 몸에 떨림이 멈추지 않아요... 하아...”
결국 현우는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먼저 아프다고 징징거리기 시작한다.
“왜... 팀장님은 여기로 차를... 끌고오신 거에요... 하아...”
그리고 결정적인 한방. 너 때문에 내가 지금 쓰러지겠다. 책임져라. 초등학생이 할 법만 투정이었지만 최고은은 그 한마디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내 운전미숙 때문에... 이대리를 아프게 할 순 없어...내가 해결해야해.’
스스로의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평생을 그런 신념으로 살아온 최고은에게 현우의 고통은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럼 일단... 뒷좌석에서 같이 앉아요. 오...오해는 하지 말아요. 전부 체온유지를 위해서니까.”
- 스르륵
그리고 최고은은 조심스럽게 현우를 끌어안는다.
- 뭉클
‘크으... 지금 이 촉감 가슴 맞지?’
분명 자켓과 셔츠, 브래지어까지 착용한 최고은이었다. 그러나 그 엄청난 크기의 바스트는 속옷과 겉옷을 모두 무시해버리고 여과 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현우에게 드러낸다.
가슴 큰 여자들이 왜 슬쩍슬쩍 알면서도 팔짱을 끼는지 알 것 같다. 이런 육탄공격을 방어해낼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깨와 팔뚝에 느껴지는 몽클한 그 가슴의 감촉에 현우는 곧바로 빳빳하게 자지를 세운다. 그녀의 의도와는 달랐겠지만 확실하게 현우의 하복부에는 체온이 급상승했다.
‘이대리 말이 맞아. 저체온증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체온을 유지시켜야해.’
“하아...”
추워서인지 흥분해서인지 구별하기 힘든 신음을 내뱉는 현우. 그의 상태를 알리가 없는 최고은은 더욱 더 꽉 온몸으로 현우를 끌어안는다.
‘킁킁... 라벤더? 섬유유연제 향인가?’
은설이 뿌리는 샤x 향수처럼 존재감 강한 향은 아니었지만 은은한 향이 현우의 코끝을 자극한다. 강한 척 했지만 추위 때문에 떨고 있는 그녀의 상태가 그대로 전달된다.
“——!”
현우 역시 최고은을 꽈악 껴안자 흠칫 떨리는 그녀의 몸.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는다. 부끄러운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현우의 눈에 고스란히 보인다.
‘아 이대로 그냥...’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산속. 차 안에 단 둘만이 남겨진 남녀. 그리고 격렬한 포옹까지. 누가 봐도 이미 끝난 상황이다. 이렇게 완벽하게 차려놓은 밥상을 못 먹으면 고자새끼 아닐까?
‘일단은 키스부터 천천히...’
욕정을 참지 못한 현우는 결국 슬쩍 입술을 최고은의 얼굴로 들이미는데,
애써 강한 척 했지만 그것도 한계였는지 그녀의 안경 뒤에 눈에는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무리 냉철한 팀장의 가면을 썼다 하지만 최고은 역시 연약한 한명의 여자에 불과했다.
‘에이 씨발...’
아직 최고은의 상태창이 확실한 확신을 주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추위와 공포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약한 그녀의 모습에 현우는 스킨쉽을 포기한다.
‘다음...다음에 하자.’
- 스윽
혹시나 빳빳해진 자지를 최고은이 알아챌까 현우는 슬쩍 하반신을 그녀에게서 떨어트린다.
그렇게 어떤 연인들보다도 뜨겁게 포옹을 한 상태로 두 사람은 몇 시간을 더 차 안에서 기다렸다. 하늘에서 태양이 고개를 들 무렵, 드디어 보험사의 긴급구조차량이 도착했다.
* * *
“하아... 시발 그냥 따먹을걸.”
산 속에서 구조된 뒤 병원에서 간단한 진료를 받고 집으로 복귀한 두 사람. 뜨끈한 물로 샤워까지 마치고 침대에 눕자 현우는 자신에 행동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하늘이 만들어준 황금 같은 기회. 앞으로 최고은과 출장에서 어제와 같은 기회가 다시 찾아올까?
‘응 없어.’
- 쾅쾅
업무시스템의 직장 관리자 권한을 얻은 뒤 그야말로 꼴리는대로 살아왔던 자신이 왜 그랬을까? 답답함에 현우는 애꿎은 매트릭스를 마구 두들긴다.
‘그놈의 눈물 때문에...’
천하의 최고은이 눈물을 흘릴 줄은 예상도 못했다. 물론 정확히 말해서 흘린 건 아니다. 그냥 살짝 촉촉이 고인 정도? 아무튼 현우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 이제 한동안 조용히 있어야 하나?”
이번일로 최고은은 현우와 거리를 두려 할 것이다. 아무래도 좀 신경이 쓰이겠지. 현우는 침대에 누워 그녀를 다시 공략할 방법을 떠올려보지만 결정적 기회를 놓친 탓인가? 막막하기만 하다.
“에이씨 잠이나 자고 내일 생각하자.”
- 우우우웅
현우가 포기하고 잠들려는 찰나, 그의 폰에 최고은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