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 타닥타닥타닥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정신없이 두들기는 키보드 타건 소리만이 울린다. 최고은 대신 보고서의 결재를 받아낸 현우 덕분에 조직혁신TF팀의 프로젝트는 순항 중이었다.
팀원들도 지금의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사업이 쭉쭉 진행되면서 바쁘더라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윗선의 승인을 받아내지 못해 검토, 또 다시 검토하는 것은 정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팀장님 오전에 말씀하신 자료 다 작성 됐습니다.”
“아... 수고했어요. 정과장님. 두고 가시면 확인 하겠습니다.”
그러나 열적적인 팀원들과는 다르게 팀장 최고은은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평소에 그녀였다면 팀원들을 독촉해서라도 빠르게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을 텐데, 오히려 작성된 자료조차 읽지 않고 책상 위에 쌓아두고 있었다.
“정과장님. 요즘 팀장님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권용찬 대리는 방금 최고은에게 자료를 제출한 정과장에게 속삭이듯 묻는다.
“그러게요...아까 박혜수 주임이 올려놓은 자료도 읽지 않고 책상에 그대로 있던데.”
“이번 주 내내 저런 상태세요. 뭐가 진행사항 중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아닌데... 경영진 컨펌도 다 받았고 속전속결로 진행만 시키면 되는 거잖아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정과장의 말처럼 TF팀은 지금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할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선두에 선 팀장이 주저앉아 있는 꼴이었다.
“무슨 개인적인 일이 생기신 걸까요?”
“평소에 개인적인 이야기는 절대 안하시는 분이라 전혀... 모르겠어요.”
최고은이 들을까 속닥거리던 권대리와 정과장은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업무로 복귀한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본 듯 최고은의 고민을 해결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문제의 원인은 바로 이현우였기 때문이다.
* * *
‘며칠째 저러고 있는 거야?’
현우 역시 최고은 답지 않은 수동적인 자세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해진 기간 안에 그녀를 공략해야만 하는 그로서는 결국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다시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로 한다.
“박혜수 주임님. 잠시만요.”
자신의 옆자리의 앉은 박주임을 살짝 불러낸 현우.
“이 대리님 무슨 일이시죠?”
“저랑 팀장님 오늘 서울출장이 잡혀서요. 출장신청 좀 부탁드릴게요.”
“네? 팀장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는데.”
현우는 곧바로 저번처럼 업무시스템의 근로계약 중 [업무협조]를 박주임에게 사용한다.
[근로계약서 1개가 소모됩니다.]
“지금 팀장님이 고민이 있으신가 봐요. 그것 때문에 아마 출장일정을 잊고 계신 거 같아요.”
“아 그러시군요. 알겠어요. 오늘 두 분의 출장처리는 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주임님.”
현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박주임은 [업무협조]를 사용하지 않는 한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결국 근로계약서 하나를 소모해서야 그녀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최고은의 오피스텔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온 밤, 은설의 오피스텔에서 획득한 금쪽같은 근로계약서가 사라진다.
[잔여 근로계약서 : 4개]
‘아 겁나 아깝네.’
현우는 박주임에게 사용한 근로계약서 1개가 아깝기만 하다. 그러나 근로계약서도 아까운 상황이지만 언제까지 최고은의 고민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린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거 같지 않았다.
‘[심리 메시지]도 변함없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사용자 : 최고은]
[심리 메시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
회사의 성공적인 혁신에 [기대감]
능력 없는 직원에 대한 [업신]
자신감 없는 이성에 대한 [경멸]
팀원 이현우에 대한 [신뢰] - 증폭 활성화
팀원 이현우에 대한 [미안함] - 증폭 활성화
아무 일 없이 최고은을 오피스텔로 데려다 준 뒤 그녀는 마치 현우을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뭔가 그녀의 [심리 메시지]가 변할 거라고 기대했지만 수차례 확인해 봐도 그대로인 그녀의 감정.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결국 답답한 현우가 먼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 우우우웅
최고은을 조수석에 태우고 현우는 업무용 차량의 시동을 건다.
“...”
조수석에서 아무 말 없이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최고은. 저번 출장처럼 보고서를 읽거나 일정 정리를 하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상태인지...’
그런 최고은의 행동에 현우는 답답하기 만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몇 시간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 침묵을 지켰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순간을
“이대리님.”
최고은이 먼저 깨트렸다.
- 흠칫
“네! 팀장님. 말씀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부름에 놀란 현우는 그녀의 이어질 말을 기다린다.
“제가 돌려 말하는 소질이 없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이대리. 전 지금 이대리가 불편하고 신경 쓰여요.”
“네?”
현우로서는 예상치도 못한 150키로 직구가 날아온다.
“그 덕분에 일에 집중하기도 힘들고 업무효율도 떨어졌죠. CEO 등 모든 경영진들이 기대를 가지고 있는 조직혁신TF의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전 이 문제를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저를 팀에서 내보낸다는 의미인가요?”
“아니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 꿀꺽
최고은을 공략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파면을 당해야 하는 현우는 그녀의 말에 긴장했는지 꽈악 운전대를 움켜쥔다.
“그럼 팀장님이 제게 원하시는 바가 뭔가요? 업무능력이 부족하니 더욱 분발해라. 그런 말씀이신가요?”
“하아... 아니에요. 이대리는 지금 잘 해주고 있어요.”
“그럼 뭐가 문제죠?”
“나도... 나도 잘 모르겠어요. 저라고 만능 해결사는 아니잖아요?”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감정에 휩쓸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던 자신이었다. 문제를 해결할 노력을 하지 않고 불평만 내뱉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잘못도 없는 현우에게 아이처럼 투덜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일단... 잠시 차를 세울게요.”
최고은의 상태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현우는 차량을 갓길로 세우곤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 꿀꺽
“일단은... 그래요. 이대리에게 사과부터 하는 것이 맞겠죠. 처음엔 왜 이대리 같은 사람이 직원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받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색안경을 끼고 이대리를 평가 했었네요. 겪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판단한 점. 제 명백한 잘못이에요.”
몇 시간이나 고민을 한 끝에 스스로 해답을 찾은 것일까? 최고은의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 속 진심을 털어낸다.
“이대리는 제 부정적인 편견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막혀있던 프로젝트의 숨통을 틔게 했죠. 사실 그건 저조차도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던 것이었어요. 그 때부터 이대리를 한사람의 팀원으로 믿어도 되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단 한 번도 개인적인 사생활을 직원들에게 해본 적 없는 최고은은 그 것이 어색했는지 살짝 긴장한 모습이다.
“부끄럽게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버린 저를... 끝까지 챙겨 준 것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순간
[사용자 : 최고은]
[심리 메시지]
팀원 이현우에 대한 [고마움] - New!
현우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안함]과 [신뢰] 그리고 [고마움]. 최고은이 현우에게 느낀 감정들이었다. 현우가 업무시스템으로 앞선 두 가지의 감정을 증폭까지 한 덕분에 그녀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를 속수무책으로 받아드려야만 했다.
그것은 언제나 잔잔한 호수처럼 흔들림 없던 최고은의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 냈다. 낯선 감정들의 증폭이 그녀를 고민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현우에게 모두 말하고 나니 어느 정도 후련하기도 하지만 지금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계속 소용돌이 치고 있는 감정들.
‘이 감정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럼...그게 끝인가요? 하고 싶었던 말은?”
“네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은 이게 전부에요.”
평생 남자에는 관심조차 없던 최고은은 자신을 바라보는 평범하기만 한 현우의 얼굴에 가슴이 살짝 두근거린다.
- 스윽
안전벨트를 풀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현우의 얼굴. 평소라면 무언가 재빠르게 반응을 보일 최고은이었지만 지금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감정들 때문에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 쪽
뭔가 축축하고 미지근한 감촉이 느껴진다. 그제야 최고은은 자신에게 다가왔던 현우의 행동의 의미를 깨닫는다.
“아...”
목적을 달성 했는지 천천히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현우의 몸. 그리고
[사용자 : 최고은]
[심리 메시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
회사의 성공적인 혁신에 [기대감]
능력 없는 직원에 대한 [업신]
자신감 없는 이성에 대한 [경멸]
팀원 이현우에 대한 [호감] - New!!!
최고은의 심리 메지지가 새롭게 갱신된다.
* * *
최고은 공략에 현우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이성에 대한 [호감]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삶을 최고은이 살아왔는지 그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고, 이성에게 관심이 있어야 호감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지독한 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최고은은 여자라면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놓치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녀의 오피스텔에서도 확인했던 것이었다.
‘하하하...’
그 사실을 깨닫자 현우는 허탈함이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어떤 대상에 대한 [호감]은 수많은 다른 감정들의 복합체가 아닐까?
그 사람에 대한 믿음, 신뢰, 고마움, 미안함, 설램 등등 수많은 감정들이 모여 [호감]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최고은의 경우에는 특이 케이스로, 본인이 이성에 대한 [호감]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탓에 그 자각이 늦어진 것이었다.
일반적인 여자였다면 현우가 증폭시킨 [미안함], [신뢰] 그리고 [고마움]에 곧바로 [호감]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순수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무지한건지...’
그리고 현우는 확신했다. 최고은의 매력에 붙은 +1은 처녀라는 사실을 말이다.
‘남자에 대한 [호감]도 못 느껴본 목석인데 당연히 처녀겠지.’
스무살의 김혜리야 그렇다 쳐도 33살의 최고은이 정말 처녀라니... 특히나 이런 폭력 그 자체인 엄청난 바디를 가지고 말이다.
“흐흐흐...”
처녀가 싫다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현우는 다른 어떤 남자의 손길도 닿지 않은 최고은의 몸을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웃음을 짓는다.
“이대리 갑자기 왜 멍청하게 웃어요? 운전에 집중해요. 저번에도 큰일날 뻔 했는데.”
“큽... 아 넵...”
[신뢰], [미안함], [고마움]의 다양한 감정들이 현우의 입맞춤을 계기로 [호감]으로 통합되면서 최고은은 이제 머릿속이 정리되었는지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상대방을 꿰뚫어 버릴 듯한 매서운 눈빛과 그 특유의 포커페이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턱을 당기고 허리를 곧게 핀 당당한 자세까지.
‘팀장 최고은. 다시 돌아왔군.’
분명 자신에 대해 [호감]을 느낄 텐데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 현우는 불안한 마음에 다시 슬쩍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분명
[심리 메시지]
팀원 이현우에 대한 [호감] - 증폭 활성화(New!)
최고은은 지금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였다.
다시 완벽하게 돌아온 최고은의 모습에 현우가 당황하고 있을 때
‘후훗...’
그녀는 겉으로는 전혀 내색 없이 속으로 웃고 있었다. 그 자신조차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그게 싫지 않은 최고은이었다.
※ 업무지시 (대리급)
[심리 메시지를 활용하여, 매력포인트 8 이상 여직원을 공략완료 하세요. 업무지시일로부터 3개월 안에 완수해야 합니다.]
[남은 기일 : 20일 16시간]
업무지시 완수까지 3주가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드디어 최고은의 [호감]을 얻어낸 현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