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 또각또각
사무실의 시계는 정확하게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언제나처럼 정확하게 출근 30분 전에 사무실에 도착하는 최고은.
“하아...”
그녀는 사무실 안쪽에 자신을 위해 마련된 팀장 자리에 앉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쉰다.
몸과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진 어젯밤의 기억. 생애 첫 관계를 부하직원과 가졌다는 정신적인 충격은 물론이고, 현우가 자신에 몸에 남겨놓은 흔적들 때문에 계속해서 어제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읏...”
방금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턱을 당겨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으려는데 등 쪽의 근육이 잔뜩 혹사를 당한 듯 당긴다. 아마도 몇 차례나 가버리면서 지독한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활처럼 휘어댄 탓이리라.
허리뿐만이 아니다.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보니 목덜미와 가슴, 허벅지 등 몸 여기저기에 붉은 자국들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발진이라도 난 줄 알았지만 최고은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피부에 붉은 자국들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결국 생전 처음 포털 검색창에 ‘키스’ ‘입맞춤’ 등을 검색하고서야 연관검색어로 뜬 ‘키스마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키스마크는 본래는 열정적인 키스나 애...애무에 의하여 생기는 멍 자국이다. 이것은 영역 표시와도 비슷하고 상대방이 ‘내...것’ 이라고 표...식 하는 것이다.”
“연인의 목에 남긴 키스마크가 죽음의 키스가 될 수도 있다? 목에 키스마크를 만들려다 뇌경색으로 사망?”‘앞으로는 못하게 해야겠어... 이거... 엄청 위험하잖아?’
지금까지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연애에 대한 정보들을 검색결과를 정독하며 습득하는 최고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했는지 오늘부로 키스마크는 죽음을 부르는 위험한 애정행위로 간주된다.
‘위험성도 위험성이지만 남들에게 보이기라도 하면...’
다른 부위야 옷으로 가릴 수 있겠지만 목덜미에 현우가 남겨놓은 자국들은 블라우스를 입어도 가려지지 않았다. 혹시나 직원들이 보게 된다면 팀장으로서의 위신은 완전히 추락할지도 모른다.
평소 화장이라고는 최소한의 여자로서의 예의, 그러니까 선크림과 간단한 눈가의 마스카라 정도만 하던 최고은은 결국 언젠가 사놓고 개봉조차 하지 않은 컨실러를 목 여기저기에 펴 발라야만 했다.
허리통증과 키스마크 뿐만 아니다.
그렇게 격한 첫경험을 하고나서도 최고은은 새벽운동을 위해 수영장에 갔다.
온 몸 여기저기가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언제나 체력 관리를 위해 꾸준한 운동을 하기로 스스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년간 빠짐없이 해온 수영.
꾸준함으로 다져진 최고은의 체력은 쉬지 않고 1시간가량 풀을 왕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는 달랐다.
조금만 킥을 차도 덜덜덜 떨리는 허벅지 근육. 꾹 참고 계속해서 수영을 하려다 하마터면 물 속에서 쥐가 날 뻔했다. 새벽시간이라 수영장에는 사람도 없는데 정말 위험천만했다.
‘키스마크 뿐만 아니라 남녀의 성행위도 위험해...’
심지어 걷는 것조차 부자연스러웠다. 자꾸만 풀리는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의 통증 때문에 절뚝절뚝 다리를 절어야만 했다. 덕분에 그녀의 뒷모습을 본 남직원들은 괜히 야릇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댔다.
그렇게 섹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최고은의 머릿속에 각인되려는 찰나
“팀장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네 안녕하세요. 박주임님, 정과장님.”
조직혁신TF팀 두 명의 여직원들이 함께 출근한다.
“와아~ 팀장님 화장품 바꾸셨어요? 완전 물광피부 장난 아니시다.”
“그러게요? 오늘 피부톤이 엄청 생기 있으시다.”
“그...그래요? 화장품은 항상 쓰던건데.”
“아니에요 완전히 피부결이 달라지신 거 같은데?”
“부럽다. 피부 너무 좋으세요. 팀장님. 호호호”
역시 같은 여자들이라 그런지 최고은의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챈다.
사실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어제의 현우와의 격렬한 첫경험으로 신체에서는 마치 지금까지 참아왔던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의 분비가 폭발하듯 활발해졌다.
원체 터질 듯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풍만한 골반과 둔부의 최고은의 신체는 유년기부터 다른 여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에스트로겐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만 지금까지 평생 남성과 멀리하면서 깊숙이 숨어버린 여성호르몬이 드디어 어제의 섹스를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꽃 피듯 피어난 그녀의 생기 있는 피부가 그것을 방증했다.
‘뭐...흐음...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지도...’
지금까지 아무리 회사에서 여자로서 신체와 감정을 죽여 왔던 그녀였지만 이쁘다 피부가 좋다 이런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때 이현우가 사무실에 출근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과 행동. 그런 그의 모습에 최고은은 괜히 화가 치민다.
‘어제 일이 신경 쓰이는 건가?’
최고은의 복잡한 심정을 알리가 없는 현우는 출근하자마자 무표정한 얼굴로 PC화면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슬쩍 스캔한다. 대충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최고은이라면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니까. 개인적인 어제에 일은 드러내지 않겠지?’
‘그래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하자.’
어차피 업무시스템에서 자신에 대한 [호감]까지 증폭시킨 마당에 굳이 공략 때문에 급할 일은 없었다. 어제 처녀까지 따먹었으니 앞으로는 일사천리리라.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오전 근무를 시작하는 현우. 물론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 * *
오전 근무시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같은 부서였지만 현우가 조직혁신TF팀으로 발령이 나버린 탓에 이별하게 된 인턴 김혜리가 팀으로 찾아온다.
“어? 뭐야? 무슨 일이야?”
“힝... 저 안보고 싶었어요? 이대리님?”
특유의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애교를 부리는 혜리. 물론 김혜리가 현우 몰래 다른 주인님을 섬기고 있긴 했지만 아직
이현우에 대한 [애정] - 증폭 활성화
업무시스템으로 증폭시켜 놓은 [애정]은 그대로였다. 최근 최고은 공략에 완전히 집중한 탓에 마지막으로 혜리의 얼굴을 봤던 게...
‘밤에 나체로 돌아다니던 혜리를 따먹은 게 마지막이구나...’
생각보다 그녀를 많이 방치시켰다. 혜리가 현우에게 서운함을 느낄 만도 했다. 그러나
- 힐끔
심지어 최고은도 있는 사무실에서 혜리와 너무 친한 척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 그래... 여기 사무실이야...”
귀에 대고 혜리에게 작게 속삭이는 현우.
“흥 오랜만이 봐서 반가워서 그런건데... 이대리님은 저 안보고 싶었나 봐요?”
이제는 볼까지 잔뜩 부풀리며 툴툴거리는 혜리. 안 그래도 상큼한 외모 때문에 회사에서 항상 주목받는 그녀였는데 더 이상의 친분과시는 위험하다고 현우는 판단한다. 괜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알았어알았어. 근데 왜 여기까지 온거야?”
현우는 일단 혜리의 관심을 돌린다.
“팀장님이 이거 최고은 팀장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셔서요.”
김혜리의 손에 든 보고서, 아마도 단순한 심부름 때문에 온 듯 하다.
“그래. 저기 팀장님 자리야. 가져다 드려.”
“네 대리님~”
“팀장님 안녕하세요. 경영지원팀 인턴 김혜리라고 합니다. 이 문서를 저희 팀장님께서 전달해 달라고 하셔서요.”
방긋 웃으며 최고은에게 보고서를 내미는 혜리.
“아 고마워요. 혜리씨.”
최고은은 그런 혜리를 보고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든다. 그 모습은 언제나 같은 그녀의 포커페이스였다.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최고은의 포스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발랄한 혜리. 웬만한 과장, 대리들도 잔뜩 긴장할 정도에 최고은인데, 현우는 그런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가?’
“그럼 이대리님 저 가볼게요. 그리고... 저 조만간 맛있는 거 사주셔야 해요? 알겠죠?”
“알았어. 언능 가봐.”
보고서를 전달한 혜리는 현우에게 슬쩍 데이트 신청을 하곤 사라진다.
- 힐끔
혹시나 최고은이 자신과 혜리의 관계를 신경쓸까봐 그녀의 자리를 슬쩍 쳐다보는 현우. 다행히 그녀의 시선은 모니터만을 향하고 있었다.
* * *
“팀장님 여기 지금까지 취합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분석내용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최고은의 책상 앞에 서서 작성한 보고서를 내미는 현우. 그의 부름에도 그녀는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지금 바로 확인할게요. 잠시만요.”
현우을 뻘쭘하게 옆에 세워두고는 보고서를 정독하는 최고은
- 스르륵 스륵
보고서의 종이가 찢어질 듯 거칠게 넘어간다.
‘보고서 종이를 넘기는 손놀림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느껴지는 건 착각이겠지?’
“이대리. 여기 도표와 문서에 요약 내용이 완전히 다른데요? 확인 제대로 하신 거 맞아요?”
“어... 분명 검토내용은 맞을텐데....요?”
“아뇨. 보세요. 여기 2페이지에 도표와 10페이지에 해설부분. 그래프로 봐서는 이런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될 거 같은데요?”
“...”
“아직도 자료 분석능력이 이렇게 부족하면 곤란해요. 오늘까지 최주임과 권대리가 준 내용까지 다 취합해서 한 파트를 완성해야 하는데 나머지 두 분한테 죄송하지도 않아요? 나머지 팀원들까지 발목 잡히게 생겼는데?”
그야말로 폭풍처럼 현우를 몰아붙이는 최고은의 질책. 마치 탈곡기에 빨려 들어간 듯 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영혼까지 털려버린다. 꽤나 이 상황, 기시감이 느껴진다.
분명 처음 발령받았을 때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최고은의 모습이었다.
‘아오... 왜 이러는거야 또.’
분명 그녀의 지적대로 조금 아주 조금...자료 분석이 애매한 부분이 있긴 했는데... 이정도 갈굼 먹을 정도로 내가 잘못한 건가? 아니 분명 다른 팀원들이 만든 자료도 다 확인해서 이정도면 오케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고은의 깐깐한 모습에 현우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사실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내심 어젯밤의 몸을 섞은 뒤로 조금.... 아주 조오금은 자신을 부드럽게 대하길 바랬는데,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 모습이다.
‘이 정도로 화낼 일은 아닌데.’
현우에게 화를 내는 최고은 역시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 분명 현우가 약간 자료결과를 확대해석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다른 팀원들도 실수 하곤 한다.
어제의 일을 없던 것처럼 태연하게 있는 현우의 모습에 본인도 모르게 화가 난 걸까?
분명 처음이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거칠게 자신을 괴롭히곤 돌아가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현우의 태도에 그녀는 서운함이 느껴진다.
‘33살에 첫경험도... 사실 자랑할 건 아니구나...’
그러나 최고은은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자 오히려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경험도 없는 여자가 부담스럽겠지? 심지어 자기보다 4살이나 연상인데.’
그녀가 잘은 모르지만 남자들은 결혼정년기를 꽉 채우다 못해 초과한 자신과 같은 여자에 부담감을 느낀다고 한다. 더더욱 처녀라면 그러하겠지.
‘그래서 연락도 안 한거야?’
오피스텔에서 나간 뒤 밤새 연락하나 없는 현우의 태도가 자신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 아닐까? 최고은은 그 사실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한데 현우의 앞에 등장한 혜리까지. 애써 두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는 척 하긴 했지만 최고은의 신경은 온통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가 있었다.
서로 밀착해서는 속닥속닥 거리며 친분을 과시하는 두 사람.
최고은이 알아보니 그녀는 스무살의 여대생 인턴이란다. 상큼한 외모와 깜찍한 애교까지 겸비한 혜리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1도 없는 33살의 자신.
‘생각할 것도 없잖아?’
최고은이 남자라고 해도 누구를 선택할지는 분명해 보인다.
연락도 없이 태연한 태도의 현우와 괜히 신경이 쓰이는 김혜리까지. 도저히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최고은이었다.
현우가 업무시스템에서 치트키처럼 여직원들의 [심리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으면 뭐하나?
팀원 이현우에 대한 [호감] - 이 한 줄의 설명처럼 모든 여자들의 마음이 단순 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4살 연상에 최고은이 느끼는 부담감과 혜리의 존재까지. 현우에 대한 [호감]이 커져가면서 그것은 그녀에게 질투라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