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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화 >





평소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자신의 나이 33살. 요즘이야 뭐 연상연하 커플도 많다지만, 현우와 친분을 과시하는 스무살 인턴 혜리를 보자 최고은은 위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질투를 한다고?’



K-드라마에서는 단골소재인 질투. 드라마를 애초에 잘 보지도 않는 최고은이었지만 가끔 지나가듯 볼 때면 여자들의 질투는 유치하고 쓸데없는 감정소모라고만 생각했다.



질투할 시간에 자기개발이나 해서 스스로 매력적인 여자가 되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그녀가 K-드라마의 질투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막상 자신에게 닥치니 흘러가 버린 시간, 이미 먹어버린 자신의 나이는 노력이나 자기개발로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신이 이제는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투. 최고은에게는 매우 생소한 감정이었다.



낮선 질투 때문에 오전 내내 저기압이었지만 최고은은 자신의 감정 때문에 업무를 소홀히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며칠째 책상 위에 쌓여있던 보고자료와 결재서류.



마치 자신의 감정을 잊기 위함인지 최고은은 며칠간 밀려있었던 업무를 단숨에 해치워버린다. 복잡한 머릿속에 비하면 이런 업무 따위야 고민할 것도 없는 간단한 일에 불과했다.



업무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12시. 점심시간이다.



“팀장님 식사하러 안가십니까?”



권용찬 대리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슬쩍 팀장에게 점심시간임을 어필한다. 소중한 점심시간의 1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아. 그러네요. 모두 점심식사 하러 가시죠.”



직장인들에게는 하루에서 2번째로 고대하는 순간이 바로 점심시간이다. 아무리 바빠도 건너 뛸 수 없는 작고 소중한 시간. 아 물론 첫 번째는 퇴근시간이다.



현우를 포함해 모든 팀원들과 구내식당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는 최고은.



- 깨작깨작



반찬도 나쁘지 않은데 유독 깨작거리며 점심을 먹는 현우. 오전에 자신에게 깨졌다고 기분이 다운됐는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그런 모습에 그의 최고은 약간 마음이 흔들린다.



다른 팀원들에게는 그렇게 깐깐하게 굴지 않았는데 아무리 개인적인 감정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질책해서는 안됐었다. 현우가 느끼기에는 부당할 터.



‘나 답지 못했어. 지적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오후에는 좀 풀어줘야겠네.’



그렇게 현우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최고은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 * *



“안녕하세요. 최팀장님. 홍보팀 은설 대리입니다.”



“네 반가워요. 그런데 무슨 일로?”



조직혁신TF팀과 홍보팀. 둘 사이에는 전혀 관련된 업무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최고은은 오늘 은설의 얼굴을 처음 봤다.



슬쩍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그녀를 스캔하는 최고은. 자신과 똑같은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이었지만 은설의 옷차림은 누가 보더라도 옷 잘 입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



늘씬한 그녀의 체형을 더욱 강조시키는 배꼽까지 올라오는 하이웨스트 스커트와 슬림한 상체에 딱 달라붙은 핏의 블라우스. 컬러도 최고은처럼 칙칙한 블랙, 네이비가 아니라 산뜻한 아이보리와 브라운으로 매치했다.



헤이스타일과 메이크업도 상당히 신경 쓰는지 어깨 바로 위의 기장의 갈색 단발머리는 자연스러운 펌으로 여성스러움과 시크함을 어필하고 있었고, 색조화장으로 고양이상의 화려한 이목구비를 더욱 강조한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귀걸이와 가녀린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팔찌까지. 여자인 자신이 봐도 은설의 패션센스는 뛰어났다.



화려함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은설의 코디. 그러나 과한 것은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고 자칫 싼티날 법도 한데 은설의 모습에서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고급스러운 느낌이랄까?



슬림한 몸매와 늘씬한 각선미까지 갖춘 은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아 팀장님 다름이 아니라 사내 봉사활동과 관련하여, 저번 주에 문서를 발송해드렸는데요. 아직 답변이 없어서요.”



“아... 그런가요? 잠시만요.”



현우 때문에 심란했던 지난주. 뭔가 빠트린 것이 있었나보다. 시스템에서 홍보팀에서 보낸 문서를 검색하는 최고은.



“직원들이 직접 참가하는 지역사회 상생 봉사활동 계획. 이거군요?”



“네 맞습니다.”



문서의 내용을 대충 요약하자면, 공공기관의 직원들이 직접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취약계층 주민들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 전달하는 것이었다.



외부에 관련 보도자료도 뿌리고 CEO까지 결재를 받은 것을 보니 홍보팀의 올해 주요 사업인 듯 했다.



“계획서에 있던 정기 봉사활동이 오늘이군요?”



“네. 맞습니다. 팀장님. 부서별로 한명씩은 반드시 참석해주셔야 해서, 이렇게 요청 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리고 불만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평하게 남녀 참석비율을 5:5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남직원 티오만 남아있습니다.”



회신이 늦어진 탓에 담당자인 은대리가 직접 찾아온 듯 했다.



“저 때문에 괜한 걸음을 하게 했군요. 미안해요 이대리.”



“아 괜찮습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아서 참석자를 정해주시면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직원이라고 해봐야 부서에 권용찬 대리와 현우뿐이다.



- 힐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매력적인 은설의 모습에 최고은은 괜히 현우를 보내기 싫어진다.



“권대리! 권대리님 지금 자리에 있나요?”



“아 지금 권대리 회의 갔습니다. 팀장님.”



자리에 앉아있던 정과장이 대신 대답한다.



‘하아...’



마침 현우 외에 유일한 남직원인 권대리도 없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현우를 보내야 하는 상황.



‘어쩔 수 없지.’



“이대리 갑작스럽긴 하지만 오늘 홍보팀 주관 봉사활동에 참석 좀 부탁드려요.”



“넵 알겠습니다.”



같은 날, 혜리에 이어 은설까지 최고은과 마주치다니. 괜히 팀장을 자극하고 싶지 않는 현우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설을 따라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저번에 그렇게 거칠게 해놓고는 괜찮다고 안부문자 하나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현우에게 투정을 쏟아내는 은설.



‘아...’



며칠 전 갑작스럽게 오피스텔로 쳐들어와선 손바닥과 나무패들 가릴 것 없이 은설의 엉덩이를 마구 두들겨 댄 현우였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오피스텔 현관문까지 활짝 열어놓고는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과거 자신의 또 다른 업보를 떠올린 그.



“현관문은 왜 열어놔서... 저 이제 이웃주민들 얼굴을 어떻게 봐요? 책임 질꺼에요? 이대리님?”



은설의 성향, [진성M]. 그 사실을 뻔히 아는데 본인도 잔뜩 느껴놓고서는 자신을 쏘아붙인다.



물론 연락은 안 해서 삐진 게 분명하지만 최고은도 아니고 툴툴거리는 은설의 투정을 현우는 받아줄 마음이 없다. 호랑이 최고은을 겪어보니 은설은 그저 앙칼진 고양이 수준이다.



‘그렇게 괴롭히고 SNS에 사진이고 동영상을 올려도 기어오르네.’



로터에 스팽킹, SNS 알몸 노출까지 강요당했지만 나머지 성향인 [여왕], [츤데레] 때문인지 은설은 항상 꺾이지 않고 현우에게 기어오른다.



‘뭐... 그게 은설의 매력이기도 하지.’



순순히 복종하면 또 괴롭히는 맛이 없다. 현우도 사실 그녀가 꺾이지 않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아직 회사 안이니까 너무 달라붙지 말라고.”



“...흥!”



- 또각또각



현우의 냉담한 반응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은설은 일부러 거칠게 하이힐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멀어진다.



물론 현우도 은설도 멀리서 최고은이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 * *



‘은설... 대리라고 했던가?’



사내 인트라망에서 곧바로 그녀를 검색해보는 최고은. 팀장들은 특별권한이 있어 모든 직원들의 개인정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홍보팀... 28살...”



당연히 자신보다 연하인 은설. 오피스룩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꾸민 그녀의 여성스러움 옷차림과 슬림하고 쭉 뻗은 각선미.



항상 칙칙한 검정색의 자켓과 스커트를 입은 자신과 너무 비교가 된다. 평생 패션이라고는 정장차림 이외에는 문외한인 최고은이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수준이다.



은설보다 키도 더 크고 무식하게 가슴만 큰 자신의 몸. 매일 수영을 하는데도 줄어들지 않는 커다란 엉덩이까지. 날씬한 슬랜더 몸매의 은설이 조금은 부러워지는 최고은이었다.



그런 최고은의 속마음을 남자들이 들었다면 통탄할 일이겠지만 본인이 가진 엄청난 몸매에 대해 별다른 자신감이 없는 최고은.



‘하아... 왜 이러지 정말.’



며칠 전만 해도 전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최고은은 자꾸만 현우 근처에 여직원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들과의 가상대결에서 언제나 참패하는 탓에 점점 자신감이 하락한다.



‘근데... 왜 이렇게 아는 여직원들이 많은 거야?’



그리고 짜증은 다시 현우를 향한다.



* * *



“그래서 오늘은 어딜 가는거야?”



홍보팀에서 준비한 대형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현우와 나머지 직원들. 의도적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옆자리에 앉은 은설에게 묻는다.



“근처에 홀로 계신 어르신들에게 안부인사 드리고, 생필품 지원해 드리려구요. 돌볼 사람이 없어서 회사에서 이렇게 정기적으로 방문 드리고 있어요.”



성격처럼 똑 부러지게 업무를 잘하는 은설이 추진하는 계획이니 빈틈은 없으리라.



“근데 그런 차림으로 봉사활동 할 수 있겠어?”



트집거리가 생각나지 않자 현우는 그녀의 옷차림을 걸고 넘어진다.



여유라고는 전혀 없이 딱 달라붙는 스커트와 블라우스. 덕분에 은설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흥!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마세요. 이·대·리·님!”



현우에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답하는 그녀. 곧 버스가 봉사활동 장소에 도착하자 은설은 직원들을 인솔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분주하게 그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직원들. 봉사활동 시간이 길지 않아 일정은 꽤나 빡빡했다.



“헉헉헉...”



‘은근 빡세네 이거.’



집들이 언덕에 있어서 생필품 상자를 들고 올라가는 현우는 거친 숨을 내뱉는다.



“이대리님.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지치신 거에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설은 뒤에서 약 올리듯 시비를 건다. 분명 아까 옷차림 가지고 뭐라고 해서 삐져 있는 게 분명했다.



‘다음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은설의 다음 조교가 벌써부터 기대되는 현우였다. 나무패들 말고 다른 도구를 빨리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은설을 괴롭힐 생각을 하며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데,





“이 손 놔요! 할아버지!”



멀리서 날카로운 은설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야 또?’



생필품 박스를 내려놓고 은설 쪽으로 다가가는 현우.



“흐으흐흐”



노숙자처럼 보이는 노인이 은설의 허리를 감싸고 놓지 않고 있었다.



“한...한번만 만져보자 응? 흐으흐흐...”



“놔! 놓으라구요!!”



약간 치매인지 정신도 모자라 보이는 노숙자. 그래도 남자라고 꽈악 움켜쥔 손아귀 힘 때문인지 은설이 저항하지만 쉽사리 떨쳐내지 못한다.



‘저 새끼가 누구 껄 건드려?’



나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딴 놈은 안 된다. 딱 봐도 눈에 띄는 은설의 옷차림에 눈이 돌아간 게 분명했다.



- 탁



“으으윽...”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앉은 더러운 팔을 강하게 쳐 내는 현우. 덕분에 노숙자를 은설에게서 떼어 놓는다.



“하아...하아...”



“누굴 마음대로 건드리는 거야? 이 새끼야 어?”



“한...한번마안.. 흐흐흐”



“씨발... 안 꺼져? 확!”



현우의 위협에 노인은 겁먹었는지 호다닥 사라진다. 다행히 체력 4의 그도 제압이 가능한 노숙인이었다.



‘휴우...체력 7의 최현민 때처럼 개쪽 안당해서 다행이네.’



아마도 자신보다 체력수치가 낮았으리라. 이럴 때 보면 [체력]도 올려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아 찍을 거 개많네.’



[사용자 이현우]

[등급 : 중급 관리자]

[체력 : 4/10] [매력 : 3/10] [정력 : 7/10] [통솔 : 5/10]

[잔여포인트 : 2]



점점 획득 포인트도 줄어드는데 찍을 건 많다. 스탯 분배에도 앞으로 계획이 필요하리라.



“괜찮아?”



“네... 괜찮아요.”



쓰러진 은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현우. 아까 그 노숙인이 만졌던 그녀의 허리부분을 탁탁 털어준다.



‘시발 어딜 더러운 손으로 내껄.’



은설의 알몸을 SNS에 잔뜩 올린 현우였지만 다른 놈이 그녀를 터치해도 좋은 건 아니었다. 은설의 탐스러운 몸뚱아리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뿐이었다.



“고...고마워요. 이대리님.”



‘뭐야 얜 또 왜 이래?’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것인데 어울리지도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 은설.



그렇게 작은 해프닝은 있었지만 오후 봉사활동 일정을 마치고 현우와 은설은 다시 회사로 복귀한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현우 옆자리에 앉은 은설은 얼굴을 붉힌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