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어?”
“하아...”
혜리를 앞을 가로막는 최현민.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지어보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용건만 간단히 해주세요. 저녁에 약속이 있어요.”
현우에게 달라붙으며 달콤하게 속삭이는 말투와는 너무나 다른 혜리의 목소리. 더 이상 최현민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그녀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알겠어.”
처음 그를 봤을 때는 그렇게 잘생겨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그냥 평범해 보인다. 아니 어수룩한 찐따 같다고나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혜리는 현민을 따라 사무실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한다. 흡연부스가 있는 탓에 평소에는 흡연하는 직원들이 많은 곳이지만 퇴근시간이라서 일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혜리야 내 말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들어.”
혜리는 이미 첫마디부터 인상이 확 찌푸려진다. 그렇게 그의 지루한 훈계가 시작된다.
“저번에 우리 호텔에 갔을 때 말이야... 너 휴대폰 모르고 두고 간 날. 내가 니 폰을 우연히 보고 말았어. 그건 먼저 사과할게.”
패턴까지 걸려있었는데 과연 우연히 본 것일까? 혜리는 속으로 코웃음 쳤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의 말을 계속 듣는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알몸사진을 찍는거야? 그리고 랜덤채팅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사진을 보여주다니. 그게 얼마나 너 위험한 행동인지 몰라?”
메신저에도 분명 별도에 비밀번호를 걸어두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척 하지만 최현민은 의도적으로 혜리의 폰을 탈탈 털어, 랜덤채팅 대화내용까지 전부 본 것이었다.
‘뭐 알고는 있었지만.’
현우의 지시로 했던 행동이었지만 혜리는 마음대로 폰을 뒤져놓고는 걱정하는 척 자신에게 훈계하는 현민의 이중적인 태도에 구역질이 났다.
잠깐이지만 왜 이런 사람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과거에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곳에서는 개인정보 특히 사진을 주고 받는 건...”
“혹시 그 사람이랑 오프라인에서 만난 건 아니지? 주소나 신상정보를 알려주면 정말 위험...”
주절주절 걱정하는 척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최현민. 혜리는 듣기 싫은지 연신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본다.
‘아 이대리님이나 보고 싶다.’
“... 알겠어? 듣고 있는 거야?”
딴 짓하는 사이에 최현민의 훈수가 끝난 모양이다.
“다 끝났어요? 이제 가도 되죠?”
“너... 내말 듣긴 한 거야?”
적당히 좋게좋게 끝내려 했는데 자꾸 질척거리는 현민에 태도에 혜리도 짜증이 난다.
“최 주임님이 뭔데 저한테 이래라저래라에요? 막말로 제 폰 맘대로 뒤진 최주임님을 더 경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내가 니 남친이잖아. 이 정도도 이야기 못해?”
휴대폰 지적에 당황한 현민.
“하아... 최주임님 눈치가 그렇게 없으세요? 전 이미 마음 정리한지 오래에요.”
“뭐?”
그의 전화도 메시지도 며칠째 씹고 있는 혜리였다. 현민이 처음 여자를 사귀는 것도 아닐 텐데 충분한 의사표현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만해요. 최주임님. 더 이상 안 봤으면 좋겠어요.”
“...말도 안돼. 난 절대 그럴 수 없어!”
혜리의 이별통보를 거부하는 최현민. 이렇게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까여 본 적이 있던가?
반반한 얼굴과 풍족한 재력 때문에 항상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현민은 차려면 찼지 본인이 까인 적은 결코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고 보니 해운대 호텔에서 기억이 없는 섹스 외에 혜리와 잠자리를 갖지 못했다. 섹스는커녕 스킨십도 거의 하지 못했다.
‘시발 내가 쓴 돈이 얼만데.’
그 사실에 현민은 갑자기 짜증이 치민다. 사귀면서 제대로 된 섹스 한번 기억이 나질 않다니
사실 그 답지 않는 질척거림은 업무시스템의 영향이었다.
[사용자 : 최현민]
[나이 : 28] [키 :185] [체중 : 73]
[체력 : 7/10] [매력 : 8/10] [성욕 : 10(+3)/10] [멘탈: 1(-7)/10]
[심리 메시지]
담당 시스템 관리에 대한 [짜증]
김혜리에 대한 [죄책감] - 증폭 활성화
김혜리에 대한 [집착] - 감소 활성화
김혜리에 대한 [애증]
혜리의 스킨십 거부로 강제적인 금욕을 한 탓에 치솟은 [성욕]. 그녀에게 놀아나며 갈려버린 [멘탈].
거기에 현우의 조작까지 더해지며 [죄책감], [집착], [애증]이 [심리 메시지]에 추가되었다. 물론 [집착]은 감소시켜두긴 했지만 이런 감정들이 뒤섞이며, 지금의 최현민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자존심 세고 자신감 넘치던 자신밖에 모르는 성격. 마치 남자 은설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했다. 그러나 지금은 20살 여대생에게 구차하게 매달리는 호구새끼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럼 전 갈게요. 약속이 있어서.”
- 휙
혜리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테라스를 빠져나간다.
“잠깐...아...”
뒤늦게 쫒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니가 날... 무시해?”
테라스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최현민의 표정이 구겨진다.
* * *
- 집에는 잘 들어갔어?
- 랜덤채팅은 더 이상 안하지?
- 술도 너무 자주 마시진 말고
...
...
“이...이 미친새끼.”
그렇게 확실하게 끝내자고 말했건만 그것조차 못 알아 처먹었는지 현민은 계속해서 전화와 메시지를 혜리에게 보낸다.
김혜리에 대한 [집착] - 감소 활성화
분명 현우가 최현민의 [집착]을 감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혜리를 포기 하지 않았다. 나머지 감정들이 영향을 준 탓일까?
혜리는 현민의 그런 행동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곧바로 그의 번호를 차단한다. 메신저 계정에서까지 삭제했으니 더 이상 그의 연락을 받지 않으리라.
“휴우,,,”
그제야 그녀는 잠이 든다.
“잠깐 좀 볼까?”
“우리 이야기 좀 해.”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할래?”
온라인 차단은 간단했지만 오프라인은 차단 기능이 없었다. 자꾸만 혜리의 사무실 자리로 찾아오는 최현민.
민망할 정도로 면전에 대고 강하게 거절했지만, 자존심도 없는지 그의 질척거림은 끝나지 않는다.
“하아...”
그녀의 인내심이 바닥나려는 찰나
- 띠링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인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혜리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메시지를 입력한다.
* * *
“뭐야? 언제부터 고민상담 창구가 된 거야?”
주인님의 계정으로 혜리에게 메시지를 보낸 현우는 갑자기 폭풍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메시지 때문에 연신 울려대는 폰을 무음으로 바꿔야만 했다.
분명 주인과 노예라는 절대적인 관계를 정립했을 텐데, 혜리는 쉴 세 없이 주인님에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뜸한 연락에 대한 서운함과 최근 자신에게 매달리는 남자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그녀.
‘최현민 이야기구만.’
덕분에 현우는 두 사람 사이에 최신근황을 알게 되었다. 명백히 이별을 통보했는데도 불구하고 혜리에게 질척거리는 현민.
‘으음... 정리하긴 해야지.’
현우 역시 혜리와 같은 생각이었다.
순수한 얼굴로 여우 짓을 일삼는 혜리와 동기 재훈의 악담 때문인지 이유 없이 비호감이었던 최현민,
그 두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썸을 타자 현우는 꼴 보기 싫어 두 사람의 관계를 업무시스템으로 갈라버렸다.
그 뒤에 현우는 혜리를 공략해, 그녀와 사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업무시스템 관리자 권한이 있는데 한 사람과 연애를 할 필요는 없었다. 회사의 여직원들이 몇 명인데.
그래서 혜리를 꼬드겨 다시 현민과 만나도록 지시했다. 순수하게 그냥 따먹으면 꼴리지 않다는 이유였다. 물론 재수없는 최현민을 괴롭히는 것은 덤이었다.
덕분에 현우는 짜릿한 처녀개통부터 현민과 데이트 할 때 중간중간 불러내 따먹는 등 쏠쏠하게 재미를 즐겼었다.
물론 스킨십은 절대 금지였다. 자신의 것을 따른 남자 놈과 공유할 마음은 당연히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 통제 범위를 벗어나네?’
그냥 호구 같이 혼자 자위나 하면서 혜리에게 끌려 다녀야 할 현민이 [집착]이니 [애증]이니 불필요한 감정들이 생겨나며 관리가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확실히 그를 정리할 시점이긴 했다.
“으음...”
그를 정리할 플랜을 생각하던 현우는.
- 그래서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녀에게 넌지시 의중을 묻는다.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혜리는 장문의 메시지로 계획을 제안한다. 그 내용을 읽은 현우는
“큭큭큭... 역시 이래야 김혜리지.”
그녀의 엄청난 아이디어에 감탄한다.
- 좋아 그 정도는 도와주도록 하지.
- 감사합니다. 주인니임~
현우는 자신이 아니라 혜리의 주인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 * *
- 최주임님 퇴근하고 잠깐 봐요. 회사 안에서 말구요.
“흐흐...그럼 그렇지.”
혜리의 만자는 메시지에 현민의 비열하게 웃음 짓는다. 그만하면 튕길 만큼 튕겼다고, 스스로 아직 죽지 않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자아... 그럼 가 볼까?”
혜리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을 품으며 현민은 약속장소로 향한다.
“으음... 여긴가?”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현민. 건물 꼭대기 층과 옥상을 전부 임대해 옥상에 루프탑 테라스를 꾸며놓은 분위기 좋은 카페였다.
아직 혜리는 도착하지 않았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감상하며 그녀를 기다리는데
- 우우우웅 우우우웅
그 때 혜리에게 걸려온 전화.
- 최주임님 지금 약속장소에 도착 했어요?
“어. 먼저 도착해서 테이블에 앉아있어. 여기 전망 좋은데?”
- 그럼 옆 건물 옥상 쪽 한번 볼래요?
“어?”
해가 조금씩 지며 어둠이 내리는 도시. 루프탑 카페와 똑같은 높이의 옆 건물 옥상을 현민은 응시한다. 거기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두 남녀가 서 있었다.
“뭐야 지금 서 있는 거 너야?”
- 네 맞아요.
두 건물 사이에 거리가 꽤나 가까워 현민의 시야에 혜리의 얼굴이 보인다.
상큼함이 터지는 귀여운 얼굴과, 슬림하지만 볼륨감 넘치는 몸매, 시스루뱅 스타일의 앞머리와 굵은 웨이브펌을 넣은 긴 갈색 헤어.
몇 시간 전에 사무실에서도 봤던 그녀의 모습이다.
그런데 옆에 남자는? 혜리에 옆에 딱 붙어 있는 의문의 남성. 검은색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한 탓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근데... 옆에는 누구야?”
- ...
아직 통화는 연결되어 있지만 혜리는 말이 없다.
- 벌떡
“뭐야!”
현민은 의자에서 거칠게 일어난다. 혜리 옆에 서 있던 남성의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깨를 쓰다듬는 손이 팔을 훑으며 아래로 내려오더니 얇은 반팔 블라우스 위로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움켜쥔다. 아직 저녁시간이라서 일까? 카페에는 아직 현민 외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그 때문일까? 의문의 남성은 거칠 것 없이 다른 한 손을 혜리의 뽀얀 허벅지를 절반 정도 덮는 짧은 기장의 프릴 스커트 아래로 집어넣는다.
얇은 재질의 스커트는 아래에서 움직이는 남자의 손 모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딜 어떻게 만지는지 혜리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로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이...이게 뭐...뭐하는 짓이야? 김혜리. 어?”
- 그렇게 그만하자고 해도,,,하응,,,최주임님이 듣질 않으니까아앙... 제가 포기하게 만들어야죠. 흐응...
가슴과 가랑이 사이를 비벼대는 남자의 손길에 혜리의 목소리에 중간중간 야릇한 신음소리가 섞여있다.
- 으드득
얼마나 꽉 어금니를 깨물었는지 턱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난다.
“당장... 그 새끼한테 그만두라고 해. 죽고 싶지 않으면.”
- 최주임님이 무슨 권리로요? 제 남자친구도 아니잖아요? 흐응...
- 콰앙
그와의 통화 중에도 실시간으로 혜리의 가슴과 치마 안쪽의 가랑이를 추접스럽게 주무르는 남자. 현민은 거칠게 테이블을 내리치며 괜한 화풀이를 한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눈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희롱당하고 있었다.
“너... 거기 가만히 있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현민은 카페 출구를 향해 움직인다. 당장이라고 혜리가 있는 건너편 건물로 달려갈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