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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화 >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며 매일 지나다니던 곳이었는데 이런 곳에 왁싱샵이 있는 줄도 몰랐다. 상가가 꽉 들어찬 건물 4층 구석에 위치한 탓이겠지.



왁싱샵 문 앞에 서서도 최고은은 쉽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약속이다.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현우에게 큰 잘못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아...”



하지만 어떤 식으로 했건 간에 자신에 입에서 내뱉은 말이다.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던 내 잘못이지.’



- 딸랑



결심을 한 그녀는 문을 열고 왁싱샵 안으로 들어간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 그래도 뭔가 부끄럽고 위축된 최고은은 카운터에서 자신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젊은 남자 종업원 때문에 더더욱 고개를 들지 못한다.



CEO에게도 아닌 건 아니라고 당차게 자신의 주장을 하던 그녀는 왁싱샵에서는 마치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다.



“예약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사람이 많아 받지 못했다는 핑계까지 원천차단 시킬 생각이었는지 현우는 친절하게도 예약과 결제까지 전부 마쳐놓은 상태였다. 회사에서 일할 때나 이렇게 철두철미했으면 좋겠다고 괜히 최고은은 심통이 난다.



“네. 예약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예약자분 성함을 알려주시겠어요?”



“최고은입니다.”



“네 오늘 브라질리언 왁싱으로 예약하셨네요. 예약내용 맞으신가요?”



“아...네...”



손님이 헷갈리지 않도록 정확하게 안내하는 종업원의 태도는 이해가 되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그의 발성은 쓸데없이 훌륭했다.



- 웅성웅성



주말이라 그런지 최고은 외에도 왁싱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여자들이 많았다. 심지어



‘남...남자도 있어?’



여름이라 그런지 제법 남자 손님들도 많았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사복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그녀는 항상 입던 스커트와 자켓에 정장 차림이다.



카운터에 서 있는 그녀에게 종업원을 포함한 다른 남자 손님들의 시선이 최고은에게 집중된다. 물론 옷차림보다는 그녀의 숨길 수 없는 몸매 때문이었다.



“정확히 예약시간에 오셨네요. 그럼 바로 들어가실까요?”



‘휴...’



미리 예약을 한 덕분에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남자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던 최고은은 예약을 한 현우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시술실로 들어간다.



“어?”



그러나 시술실에서 최고은은 의외의 인물과 마주한다.



* * *



그럴 때가 있다. 알아서 하려는데, 잔소리를 하면 괜히 하기 싫어지는. 은설이 딱 그랬다.



“안 그래도 하려고 했는데... 진짜 짜증나.”



누구보다 끔찍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은설이다. 식단부터 운동, 패션, 헤어, 메이크업 제모까지. 최근에는 그리고 현우의 지시로 브라질리언 왁싱까지 그녀의 관리항목에서 추가된 상태였다.



왁싱은 털이 너무 짧으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어느 정도 음모가 자란 뒤에 왁싱샵에 방문하던 은설이었다.



하필 현우의 자취방에 병문안 간 날, 딱 왁싱을 받기 위해 조금 털이 자란 상태였다.



아프다더니 몇 번이나 더 그녀를 범한 현우. 은설은 바이브레이터에 애널스틱에 스팽킹까지 동시에 당한 탓인지 기절하듯 그의 자취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은설의 알몸을 훑던 현우의 눈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향한다. 자신의 지시대로 항상 위쪽의 음모는 하트모양으로 정리하는 은설. 그런데 음모가 꽤나 자란 상태였다.



- 이거 정리 제대로 안해?



왁싱을 해보지 않은 현우가 음모가 어느 정도 자라야 할 수 있다는 사실 따윈 알리 없었고, 그의 노골적인 지적에 수치스러운 듯 가랑이를 두 손으로 가리는 은설.



- 당장 하러 가.



평소엔 신경도 쓰지 않더니, 굳이 왁싱샵에 예약까지 잡아놓은 현우. 그녀는 그 지시에 거부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듯 고개만 끄덕인다.



* * *



“팀...팀장님?”



그렇게 예약시간에 맞춰 왁싱샵을 방문한 은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하게 시술실 안에서 몇 번 본적은 없지만 익히 잘 알고 있는 팀장, 최고은을 마주한다.



외모 뿐만 아니라 업무능력까지 완비된 완벽한 커리어우먼을 꿈꾸던 은설은 같은 여자로서 최고은을 동경해 왔다. 아무런 백도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만으로 최단기에 팀장 자리에 오른 그녀.



특히 조직혁신TF팀은 회사 내에서 실세 중에 최고 실세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뭔가 꺼림칙했다. 같은 팀의 이현우 대리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 서진아때도 그랬지만 은설의 예리한 촉은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남자가 생겼나?’



다가가기 매우 날카로운 분위기지만 은설이 보기에도 최고은은 꾸민다면 충분히 예쁜 얼굴이었다. 몸매도 조금 무식해보이는 가슴이지만 늘씬한 키와 잘록한 허리, 풍만한 골반라인은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아닌데?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이미 최고은에 대한 사전조사를 끝낸 은설. 매일같이 늦은시간까지 야근, 심지어 주말에도 일만 한다는 소문이 회사에 파다했다. 물리적으로 그녀가 데이트를 할 시간은 없었다.



그러데 왁싱샵에 온다고? 확실히 수상했다. 그 순간



- 킁킁



‘이... 사람이었어!’



최고은의 몸에서 풍기는 옅은 섬유유연제의 향이 은설의 코끝에 스친다. 대중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평범한 섬유유연제 향이었지만 현우의 병문안 때 그의 자취방에서 남아있던 냄새와 똑같았다.



그리고 서로 뜨겁게 뒹굴기라도 했는지 엉망이 된 침대보와 이불. 그리고 현우의 것이 아닌 특유의 살내음까지.



은설은 바보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모든 단서들이 순식간에 맞춰지고 하나의 부정 할 수 없는 결과값을 도출해낸다.



[사용자 은설의 애정도가 5 감소합니다.]



‘나쁜 놈...’



- 꽈악



현우가 자신만을 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현우와 함께 몸을 섞은 최고은을 보자 그녀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도대체 이사람은 왜...’



비상식적인 정력과 더 비상식적인 성기의 크기. 그것말고 현우에게 봐줄 것은 전혀 없는데,



부족한 것 없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난 그녀가 왜 현우의 병문안까지 와서 몸을 섞고 있을까? 은설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은설 대리?”



은설이 혼자 상념에 빠져있을 때 최고은 역시 그녀를 알아본다.



“어머... 최고은 팀장님 맞으시구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팀장님이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왁싱샵에 왁싱하러 왔지 다른 용무가 있을까? 은설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최고은의 얼굴에 살짝 드러난 당혹감을 찾아내곤 먼저 선공을 날린다.



“아... 시술 받을게 있어서요. 은 대리도?”



“네 저도 시.술. 받으러 왔어요. 근데 선생님 저 원래 1인실 아니었나요?”



매월 한 번씩, 이곳에서 왁싱을 받은 은설은 항상 1인실에서 시술을 받았었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브라질리언 왁싱을 한다고 소문내고 싶지않는 여성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왁싱샵은 꽤 사생활 보호가 잘 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이렇게 보고 싶지않는 최고은 팀장과 마주칠 일 자체가 없을텐데.



“아... 고객님 그게 죄송합니다... 요즘 가장 성수기인 여름이라서 방문하신 고객분들이 많아졌어요. 특히 오늘은 주말이라 1인실은 이미 모두 만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같은 시간에 예약하신 두 분이 이 커플실에서 함께 시술받게 되었습니다.”



“혹시... 너무 곤란하시면 취소하시고 다음에 하셔도 돼요. 페널티 없이 취소는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연신 함께 고개를 숙이는 두 여자 왁서. 그 때문일까? 까칠한 은설 역시 화가 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늘 취소하면 가능한 다음 시술일은 언제인가요?”



“네 고객님... 뒤로도 예약이 전부 꽉 차있어서요... 2주 뒤에나 가능할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하아...”



2주는 너무 늦다. 현우가 절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예약까지 해주었는데... 반드시 오늘 왁싱을 해야만 했다.



‘그럼... 저쪽이 안된다고 하면...’



은설은 최고은 팀장에게 시선을 돌린다. 평소 회사에서 빈틈없는 포커페이스의 소유자였지만 그녀는 오늘은 생전 처음 보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금만 푸쉬하면 안 할거 같은데...’



은설은 최고은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무언의 압박을 한다.



최고은만 다음에 한다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굳이 왁서도 아닌 남에게 자신의 음모를 북북 뜯어내는 추태를 보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도 오늘 꼭 해야 해요.”



잠시 고민하던 최고은 물러섬이 없었다. 잠시 눈빛이 흔들렸지만 원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는지 단호한 대답이다.



‘은설 대리.’



가뜩이나 처음 왁싱샵에 방문했는데, 회사 직원을 만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현우가 예약은 해주긴 했지만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약속만 지키면 되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쓰이지?’



물러서고 싶지 않다. 자신답지 않게 괜한 오기가 생긴다. 2주 후에 1인실에서 부담없이 시술을 받으면 되는데, 오늘 은설 대리와 함께 시술을 받는 건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현우에게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던 은설. 사무실에서, 특히 자신의 눈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서일까?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괜히 은설 대리가 자꾸 신경에 거슬린다.



“어... 그럼 두 분 다 괜찮으시다고 하시니까... 시술 진행할게요.”



갑자기 시작된 두 사람의 신경전에 중간에 끼인 왁서는 빨리 시술을 끝마치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여기 고객님 상하의를 탈의하시고 누우시면 돼요.”



“네? 전부요?”



갑자기 옷을 전부 벗으라는 왁서에 이야기에 최고은은 조금 당황스럽다.



“아 처음이시구나. 고객님이 입고 계신 옷이 너무 타이트해서 벗으시는 게 왁싱 할 때 편하세요. 통증이 꽤 심해서 많이들 격렬하게 움직이시거든요.”



“네...”



두 사람 사이에 칸막이가 있다지만 커플 전용실이라서 인지 충분히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은설은 이미 몇 번 시술을 받아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품이 널널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 스르륵



은설은 원피스 밑단만 허리까지 올리는 것으로 준비가 끝났지만, 최고은은 스커트와 블라우스, 팬티까지 모두 탈의해야만 했다.



잠시 후, 크기 때문인지 윗가슴을 절반 정도 노출시키는 검은 브라우스를 제외하고 최고은은 완벽한 나신이 된다.



‘흐응... 젖소도 아니고 무식하기만 하네. 흥!’



슬쩍 곁눈질로 최고은의 알몸을 스캔하는 은설. 항상 이상적인 몸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최고은의 몸매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비율과 라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풍만한 가슴을 폄하하긴 했지만 가슴 큰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보지 못했다.



‘뭐야 복근도 선명하네... 저거 만들기 엄청 힘든데...’



‘흥 그래도 이대리는 내 몸을 더 좋아할걸? 아줌마 주제에.’



그러나 인정하기 싫다. 은설은 괜한 질투가 나서인지 결국 최고은의 나이까지 들먹이며 스스로 자기합리화를 하기 시작한다.



“어머... 고갱님 몸이 너무 이쁘시다. 그럼 시술 진행할게요. 으음... 예약으로 요청해 주신 디테일이... 슬림 스트립(slim strip), 얇은 일자네요? 맞으신가요?”



“...네?”



알몸으로 시술대에 누운 최고은은 왁서의 이야기에 화들짝 놀란다. 그냥 왁싱하면 하는거지 무슨 디테일이 있단말인가? 헤어 스타일도 아니고. 심지어 현우가 미리 골라 놓은 모양이 있다는 사실에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오른다.



“너무 잘 고르셨어요 고갱님. 이게 가운데에 아주 얇게 선만 남기는 디테일인데요. 하고 나면 너무 섹시하세요. 또 세련된 느낌이 들기도 하구요. 정말 고객님 몸매에 너무 잘 어울릴 거에요.”



“그...그래요?”



“호호호 남자친구분 너무 좋으시겠다.”



“풋...”



“,,,”



최고은이 받을 디테일을 옆에서 들은 은설은 의도적으로 살짝 비웃음을 내뱉는다. 그것도 최고은의 귀에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게.



물론 은설의 의도대로 최고은은 그녀의 비웃음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가뜩이나 지금 알몸에다가 완전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냥 2주 뒤에 할걸...’



예상치도 못한 현우가 남긴 디테일 때문에 최고은은 수치심을 느낀다.



- 꽈악



‘이대리... 정말 출근하기만 해봐...’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꽈악 힘이 들어간다. 개인적인 감정을 절대 회사에서 드러내지 않는 최고은이었지만, 절대로 이현우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