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풀에 들어가는 뒷모습이 영락없는 초등학생이다. 그래도 현우는 수영을 어느 정도 배웠는지, 어설프지만 자유형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피식
그런 수영 실력이 가소롭기만 한 최고은. 지금이야 그냥 취미로 하고 있지만 고교시절에는 본격적으로 선수활동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많이 받았었다.
물론 운동보다는 학업에 더 집중하라는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긴 했지만 말이다.
그 때문일까? 현우의 수영 실력은 단번에 파악한 최고은. 이제는 어설픈 도발에 대한 대가를 치를 차례였다.
초보든 프로든 걸어온 승부에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것. 그녀가 생각하는 상대에 대한 예의였다.
- 슈욱
입수 자세를 취한 그녀는 도약해 유려한 곡선을 만들어내며, 풀로 다이빙한다. 손끝부터 어깨와 머리, 상체와 하반신 순서대로 입수해 수면과 닿는 신체의 면적을 최소화시킨다.
몸 전체를 완벽한 유선형으로 유지한 덕분에 현우의 다이빙처럼 사방팔방으로 물이 튀지 않고, 미끄러지듯 물 안으로 입수한다.
“와아...”
“선수인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완벽한 그녀의 다이빙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입수만 보더라도 그녀의 수영 실력이 얼마나 고여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 촤악촤악
부드러운 입수와는 상반된 시원시원한 스트로크. 탄력 있는 허벅지에서 나오는 힘 있는 킥까지 더해지며 순식간에 앞서 나아가던 현우를 추월해버린다.
‘어...어?’
최고은의 수영 실력이 뛰어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녀 간에 체급이 다른데...
너무나 쉽게 추월당해버린 현우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 악물고 필사적으로 손과 발을 움직인다.
그러나 둘 사이의 격차는 줄어들긴커녕 점점 더 벌어진다. 후발선착. 늦게 출발한 최고은은 현우보다 더 빨리 풀 반대편에 손끝을 터치한다.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갑갑하게 머리를 누르는 수영모와 수경을 시원하게 벗는다.
“패배를 인정해야지?”
평소처럼 무표정에 가까운 포커페이스였지만, 현우가 느끼기에 뭔가 즐거워 보이는 최고은. 물에 젖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뒤로 넘기는 데, CF에 한 장면 같다.
‘사무실에 온 거 같네...’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영락없는 팀장 최고은의 모습이었다.
“하아하아... 다시 해요. 팀장님. 승부는 삼세판 아닙니까?”
“그래. 좋아.”
그렇게 두 번의 방심은 없다며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현우. 그 결과는
3:0. 삼대떡 완패였다.
5선 3승제라며 바득바득 우겨 한 판을 더 했지만 결과는 변함없었다. 피지컬은 동등 또는 우위였지만 기본적인 수영 스킬에서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현우였다.
‘젠장...’
여자인 최고은에게 이렇게 무참하게 박살 나다니. 현우는 그래도 남자라고 자존심이 상한다. 마치 여자친구와 오락실에 가서 레이싱 게임을 하는데 코너에서 완전히 추월당한 그런 느낌? 굴욕적이다.
“이 대리. 스트로크할 때 팔의 각도가 이상해. 그리고 킥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힘으로만 하면 물만 잔뜩 튀지 비효율적이야.”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고은은 그의 자세를 유심히 살피더니 상세하게 자세를 지적해준다.
“자. 한번 해봐.”
“넵.”
갑자기 자유 수영에서 강습시간이 되어 버린 두 사람. 물론 강사는 최고은이다.
- 몰캉
현우의 팔 동작을 지도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밀착한 최고은의 가슴이 어깨에 닿는다. 몸을 꽉 잡아주는 수영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거유는 현우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지만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는 무방비한 최고은의 행동에 현우의 자지가 순식간에 빳빳해진다.
‘안돼!’
크기가 크기인 지라 수영복 아래서 발기했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변태로 오해받기 딱 좋았다.
야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최고은의 지도에 최대한 집중하는 현우.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정적으로 자세를 티칭 해주는 최고은의 살결이 자꾸만 몸에 닿는다.
‘팔동작...팔동작...’
그 필사적인 노력 때문일까? 어설픈 그의 스트로크는 꽤 그럴싸한 자세로 일취월장한다.
“그래. 이 자세야.”
최고은도 현우의 변화에 만족했는지. 흡족한 표정이다.
“초보자가 처음부터 무리하면 안되니까 잠깐 쉬도록 해.”
‘초보자? 무리?’
딴에는 현우를 배려한 것이었지만,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자존심을 완전히 박살 내 버리는 최고은.
“팀장님.”
“왜?”
“진짜 마지막으로 승부 한번 하시죠.”
“뭐? 됐어. 이미 이대리 실력도 다 봤는데.”
“크윽... 그럼 진 사람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도 하죠. 어때요? 팀장님.”
“애들도 아니고 무슨 내기야. 됐어.”
“왜요 소원 들어 줄까봐 걱정되세요?”
“...좋아.”
현우의 유치한 도발에 단숨에 넘어오는 최고은. 그녀는 원래 다가오는 승부를 피하지 않는다. 그런 승부욕이 지금의 팀장 최고은을 만들었겠지.
“그 전에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화장실을 핑계로 탈의실로 돌아온 현우는 자신의 락커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곧바로 실행시키는 업무 시스템.
자세교정 조금 받았다고 최고은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현우는 몇 차례의 승부로 깨달았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승부에서 패배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좀 치사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도핑이었다.
자신의 [상태창]에서 [잔여 포인트] 하나를 고민 없이 [체력]에 투자한다. 어차피 [체력]의 투자할 생각을 하고 있던 그였는데, 지금 당장 더 높은 [체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사용자 이현우]
[등급 : 중급 관리자]
[나이 : 29] [키 :177] [체중 : 68]
[체력 : 8/10] [매력 : 3/10] [정력 : 8/10] [통솔 : 5/10]
[잔여포인트 : 1]
‘이번엔 기절까지 하진 않겠지?’
무식하게 저번처럼 2포인트를 동시에 올리지는 않았다. 제발 고통이 적기를 기도하며 현우는 앞에 있는 라커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쥔다.
- 쩌저적 쩌적
뼈과 근육이 끊어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린다. 실제로 그의 몸 안에서는 뼈와 근육이 부러지고 파열되며, 다시 붙기를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크아아악!”
역시나 타는듯한 고통이 온몸에서 밀려온다. 갑작스럽게 변화된 신체에 적응하기 위한 반응이었다.
- 딱딱딱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턱이 덜덜 떨리며, 위아래 이빨이 서로 마구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허억...헉헉...”
다행히 1포인트만 올린 탓일까? 저번처럼 기절하진 않고 지옥 같았던 고통은 조금씩 사라져간다.
“휴우...”
“오!”
체력을 7로 올리면서 제법 근육으로 갈라진 몸매를 갖게 된 현우. 거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간 [체력] 덕분일까?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난 근육과 벌어진 어깨.
“흡!”
힘을 줄 때 드러나는 복부의 식스팩까지. 몸 안에서는 넘치는 에너지가 들끓는다.
“좋았어!”
역시 체력은 국력이라고 현우의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지금이라면 아까보다는 훨씬 빠르게 헤엄을 칠 수 있으리라.
‘아까와는 다를 거예요. 팀장님. 큭큭큭...’
그렇게 최고은 몰래 도핑까지 마친 현우는 다시 그녀가 기다리는 풀장으로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떡 벌어진 신체만큼이나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 * *
‘말도 안돼...’
“하아하아...하아...”
분명 처음보다 조금 자세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초보티를 벗어나지 못한 현우였다. 그래도 남자라고 체력으로 밀어붙이려는 모습이었는데, 그 정도는 자신의 스킬로 충분히 격차를 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도착지점까지 지칠 줄 모르고 손과 발을 휘젓는 마구잡이식 수영에 최고은은 패배했다.
“하아하아... 하하하하...”
심장이 터질 듯 헐떡거리는 현우였지만, 승부에서 이겼다는 쾌감 때문일까?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온다.
방금까지 자신만만한 표정의 최고은은 수영모와 수경을 벋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풀장을 바라본다.
“후우...후우... 팀장님 내기 기억하시죠?”
“...말 안해도 알고 있어.”
3연승을 한 뒤에 1패. 단 한 차례의 패배였지만 그녀는 졌다. 그것이 두 사람의 대기 조건이었다. 억울하지만 승부는 승부다.
“소원... 소원이라 흐흐흐... 뭐든 다 들어주시는 거 맞죠?”
“큭...”
살살 긁어대는 현우의 빈정거림. 그의 머리를 확 물속에 처박아버리고 싶지만, 정정당당한 승부의 승자는 현우다. 패배했을지언정 구차하게 발끈하고 싶진 않다.
승리에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에 승복하는 것. 최고은은 항상 그러했다.
“빨리 말해. 뜸 들이지 말고.”
그 때문에 어떠한 부탁도 군말 없이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우의 손에 이끌려 그의 자취방으로 끌려간 최고은은 소원이 생각보다 훨씬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두 번 다시 그와 어떠한 승부도 하지 않기로 다짐할 정도로 말이다.
* * *
자신의 자취방에 최고은을 데려온 현우는 옷장을 열더니, 정체불명의 커다란 상자를 하나 꺼낸다.
그러곤 안쪽에서 남자인 현우의 집에는 절대 필요하지 않은, 여성용 속옷을 줄줄이 꺼내기 시작한다.
“너...너는 이런 걸 잘도...”
최고은의 얼굴이 단숨에 확 달아오른다. 속옷은 모두 그녀의 기준으로 하나 같이 천박하기 짝이 없는 것뿐이었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최고은은 손에 잡히는 아무 속옷을 하나를 들어 올려 본다.
‘H..,’
속옷 탭에 쓰여있는 신체 사이즈. 정확한 자신의 브라컵이다. 다른 브래지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계획적이었구나.“
- 획
이제야 현우의 음흉한 속내를 파악한 최고은. 흡사 호랑이의 안광을 뿜어내듯 매서운 눈빛이 현우에게 향한다. 그 섬뜩한 눈빛 때문일까? 속옷뿐만 아니라 이제는 여성용 의류까지 꺼내던 그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팀..팀장님. 소원소원...“
”이... 이따위 천 쪼가리를 입히려고 그런 내기를 한 거야?“
현우의 소원은 간단했다. 매일 상하의 똑같은 칙칙한 색의 정장만을 고집하는 최고은에게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어 달라고 한 것.
사실 그녀가 그런 옷차림을 고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결재를 받거나 발표를 할 경우 화려하거나 단정하지 않은 복장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다.
머릿속에 온통 업무만이 가득 차 있는 워커홀릭 최고은에게 정장은 회사에서 어떠한 업무를 하던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옷차림이었다.
그런 자신의 패션을 지적하는 현우의 말이 맘에 들진 않았지만, 다른 옷을 입어 달라는 것이 소원이라면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천 쪼가리들을 보니 자신의 생각이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자! 오늘은 이거. 입고 나오실래요. 팀장님?“
현우의 퍼스트 픽은 역시나 T팬티였다. 서진아도 은설도 항상 그의 한결같은 취향 때문에 이제는 거의 매일 둔부를 완전 드러내는 T팬티를 착용하고 있다.
’쩌는 몸매를 가지고 있으면 보여주는 게 매너 아냐?‘
참으로 이현우 다운 발상. 사실 꾸준한 수영으로 다져진 최고은의 몸매를 평범한 브라와 팬티로 가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이런 속옷을 입으라고 하면 최고은의 성격상 거부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결국 그녀에게 강제적으로 지시를 내리려면 [프라이드]를 깎아야 하는데 사실 그것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현우는 최고은의 강직한 성격을 이용해 승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야 말았다.
’큭큭큭... [프라이드]를 꺾기 어렵다면, 역으로 그 [프라이드]를 이용하면 되지.‘
이럴 때만 악마의 재능을 발휘하는 현우.
”...“
말없이 현우가 건넨 T팬티와 망사재질의 야릇한 브래지어를 손에 든 최고은. 평소에 자신이 입던 속옷과는 같은 여성용 속옷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있던 그녀는
- 쾅
속옷을 갈아입기 위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닫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거칠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