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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화 > 차수빈의 공략 (1)





“저건... 최고은?”



차수빈에게 신경이 온통 집중되어 있던 탓에 현우는 회식자리에서 그녀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최고은은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몸을 차수빈에게 부축받으며 자신의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차수빈이 다른 남자에게 달라붙어 있었다면 당장에 뒤통수라도 날려버릴 생각이었던 현우는 일단 두 사람을 조심스럽게 뒤쫓는다.



- 삐삐빅 삐빅삐빅



평소 잔 실수 하나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인 최고은은 정말로 잔뜩 취했는지 공동 현관문에서 비밀번호를 몇 번이나 틀리고 만다. 날카로운 경고음이 몇 번이나 울리고서야 두 여자는 간신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까지 기다린 현우는 능숙하게 최고은의 오피스텔 공동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뒤를 따라간다.



그리고 최고은의 오피스텔 문 앞에 도착해, 숨을 죽인 채 조용히 기다린다. 살짝 현관문에 귀를 대보지만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그래도 방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현우는 결국 선택을 해야 했다.



- 꿀꺽



‘설마 좆되기야 하겠어?’



이미 최고은도 자신의 오피스텔에 현우가 출입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불상사가 발생하더라도 그녀가 잘 변호를 해줄 터.



- 삐비빅



이미 수차례나 그녀의 방에서 몸을 섞은 현우는 능숙하게 비밀번호를 입력하고는



- 끼이익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크지 않은 10평 정도의 오피스텔인 탓에 현관에서도 안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불도 끄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최고은과 차수빈.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는지 출근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 흠칫



현우는 혹시나 자신의 모습을 볼까 재빨리 냉장고 뒤쪽으로 몸을 숨긴다.



“으음...”



취기 때문인지 이미 잠에 빠진 최고은. 그리고 현우를 비롯한 팀원들에게 잔뜩 술을 얻어 마신 차수빈 역시 술에 취해 현우가 들어 온지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뭐야? 그냥 집까지 데려다주고 자기도 잠든 건가?”



허무한 결과에 현관문 앞에서 초조하게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아무리 취했다고 하지만 집안까지 들어와 챙겨준다고?’



보통이라면 택시에 태워 보내거나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정도가 아닐까? 술에 취한 여자의 집 안까지 따라 들어오는 건 보통 남자가 따먹으려 할 때 말고는 없을 텐데. 심지어 팀장의 집이다.



“잠깐... 따 먹어?”



현우의 머릿속에서 차수빈의 지난 행동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남자가 봐도 잘생긴 박원준의 찝쩍거림을 단호하게 쳐 낸 것, 굳이 잘 있던 예산팀에서 조직혁신TF팀으로 옮긴 것, 최고은을 훌륭한 커리어 우먼으로 추켜세운 것, 회식자리에서 최고은 옆자리에 딱 붙어 있던 것까지.



뭔가 별거 아닌듯하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던 그녀의 행동들이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설마?”



현우는 곧바로 휴대폰에서 업무시스템 앱을 실행시켜 차수빈의 상태를 확인한다.



[사용자 : 차수빈]

[나이 : 26] [키 :167] [체중 : 52]

[체력 : 8/10] [매력 : 10(+1)/10] [성욕 : 8/10] [멘탈 : 8/10]

[만족도 : 1/10]* [호감도 : 9/10]* - New!

[성향 : 우아, 색기, 소유욕, 레즈] - New!



[심리 메시지]

프리선언 후 미래에 대한 [불안]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욕구] - 증폭 활성화

지방 촬영에 대한 [지루함] - 증폭 활성화

최고은에 대한 [호감] - New!



업데이트 된 그녀의 상태.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차수빈의 [성향]. 현우의 예상대로였다.



“시이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수많은 성향 중에 하필 [레즈]라니.



서진아는 [배덕], 은설은 [피학성애], 김혜리는 [노출증], 최고은은 [애널].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공략한 여직원들의 [성향]도 하나 같이 정상적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차수빈의 [레즈]. 레즈비언, 말 그대로 여성인 동성애자를 뜻하는 단어가 아닌가? 그래도 다른 여직원들은 최소한 이성애자이긴 했었다.



‘잠깐...페널티가 뭐였지?’



차수빈의 공략 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수렴한다고 생각한 현우는 곧바로 자신의 페널티를 떠올린다.



※ 업무지시 (과장급)

[심리 메시지를 활용하여, 매력포인트 9 이상(보정 제외) 여직원을 공략완료 하세요. 업무지시일로부터 6개월 안에 완수해야 합니다.]

[성공 시 1포인트 지급]

[실패 시 파면, 모든 스탯 초기화]



“아아...”



[업무지시] 항목에서 실패 시 페널티를 확인한 순간 냉장고에 몸을 기댄 그의 눈앞이 깜깜해진다.



회사에서 짤리는 것은 물론, 강하다 못해 폭력적인 [성욕]과 쩍쩍 갈라진 근육들을 만들어내던 [체력]까지 다시 보잘것 없는 평균 이하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 쾅



“시발 레즈를 무슨 수로 공략해?”



최고은과 차수빈이 바로 옆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화가 치민 현우는 애꿎은 냉장고를 주먹으로 두들긴다.



- 움찔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최고은의 몸이 살짝 떨렸지만 다행히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휴우우...”



최고은의 움직임에 곧바로 이성을 되찾은 현우는 나갔던 정신을 잡고 처음부터 천천히 차수빈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지금껏 업무지시를 봤을 때, 공략을 할 수 없는 것은 없었어.’



일단 그녀의 성향부터 확인한다. 떡하니 [성향]에 박혀있는 걸 보니 확실히 차수빈이 묘하게 흘리는 [색기]는 자신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섹시하면서도 동시에 천박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분위기 있어 보였다. 그것은 아마 [우아] 때문이겠지. 그리고 [소유욕]과 문제의 [레즈]까지.



4개의 성향만으로도 대략적으로 차수빈이 어떤 여자인지 파악이 가능했다. [소유욕]까지 결합해 봤을 때 그녀는 자신이 찍은 여자에 집착하는 스타일의 레즈지 않을까?



그리고 [심리 메시지]에 추가된 최고은에 대한 [호감]. 레즈인 그녀는 역시 최고은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으음...”



쭉 살펴보아도 레즈인 차수빈을 공략할 특별한 단서는 없어 보인다.



‘그건 그렇고 벌써 [호감도]가 9이네.’



한 개만 더 오르면 최고수치가 되는 [애정도]. 이상형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렇게 빨리 [애정도]가 오르지 않을텐데, 차수빈이 최고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만족도 : 1/10]* [호감도 : 9/10]*



현우는 차수빈의 갱신된 [만족도]와 [호감도]에서 작게 빛나고 있는 별 모양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을 터치하자 마치 게임에서 부연설명을 하듯 작은 창 하나가 튀어나온다.



*대상 : 사용자 최고은



‘대상... 최고은?’



이미 그녀의 심리 메시지에서 최고은에 대한 [호감]을 확인한 현우. 차수빈의 [만족도]와 [호감도]의 대상이 최고은인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근데 왜 당연한 것을 부연설명까지 해 놓은 걸까?’



“혹시...?”



회사에서 파면은 물론 스텟 초기화는 절대 당하고 싶지 않은 현우의 머리가 오랜만에 팽팽 돌기 시작한다.



레즈, 호감도, 최고은에 대한 애정, 업무지시 완료....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그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조각들.



“아!”



순간 그의 눈이 반짝인다. 다행히 현우는 무언가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큭큭큭...그래...그렇게 하면... 가능하겠어.”



다시 한번 현우는 확신했다. 불가능한 [업무지시]를 업무시스템은 부여하지 않는다.



차수빈의 공략방법이 정리되자 그는 곧바로 행동에 나선다. 마침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여자.



- 찰칵찰칵



현우의 폰카에 술에 취한 최고은과 차수빈의 모습이 담긴다. 차수빈 공략에 이 사진은 반드시 필요한 조각이었다.



“큭큭큭...”



방금까지의 절망감이 짜릿한 기대감으로 뒤바뀐다.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아침발기를 책임져주던 기상캐스터 차수빈을 몸 아래에 깔고 더럽힐 생각에 현우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일렁인다.



‘그럼 조만간 다시 보자고.’



사진 촬영을 마친 현우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최고은의 오피스텔을 빠져나간다. 그가 떠난 방 안에는 두 여자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 * *



- 삐비빅 삐비빅



매일 아침마다 최고은의 기상을 책임지고 있는 알람이 울린다.



- 탁



익숙한 손짓으로 알람을 끈 최고은은 잠에서 깨어난다. 수영으로 잘 관리된 그녀의 몸은 평소라면 가볍게 침대에서 일어났을 테지만,



“으윽...”



지난밤 회식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지끈 쑤신다. 거기에 울렁거리는 속까지 더해지며 몸이 솜처럼 축축 늘어진다.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주량도 세지 않은데, 최근에 자꾸만 과음을 하는 술자리가 늘어난다. 앞으로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최고은은 어제의 일을 떠올린다.



분명 회식 장소에서 멀지 않은 집까지 걸어온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술에 취해 잘 걷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누군가가 부축해 줬었다.



‘이대리...인가?’



최고은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뿐이었다. 그렇다면 함께 잠이 든 것일까?



- 스윽



자신의 손을 침대 옆으로 뻗는 최고은. 손끝에 따듯한 체온에 신체가 느껴진다.



‘역시...이대리였구나.’



숙취로 두통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최고은은 살짝 미소지으며 그의 몸을 뒤에서 껴안는다. 끝까지 자신을 챙겨준 현우에 대한 애정이 가득 묻어나는 포옹이었다.



- 몰캉



‘몰캉...?’



그런데 탄탄한 현우의 가슴이 아니라 낯선 감촉이 느껴진다. 마치 스스로의 가슴을 만지는 듯한, 부드럽고 탱탱한 촉감이었다.



‘이대리가 아니야?’



“——!”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이현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최고은은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난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들었는지 출근할 때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 스윽



그리고 정체불명의 여자가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수...수빈씨?”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자신의 침대에는 어젯밤 함께 술을 마셨던 차수빈이 있었다.



“으음...”



천천히 눈을 뜨는 그녀.



지난밤 과음에, 여기저기 지워진 화장,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 그럼에도 같은 여자인 최고은이 보기에 차수빈은 아름다웠다.



질투나 부러움 같은 다른 감정이 더해지지 않은, 최고은은 순수하게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꼈다.



“일어났어요? 팀장님?”



자신보다 먼저 일어난 최고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차수빈. 그러나 어딘가 어제와는 달콤한 톤의 목소리에 최고은은 살짝 당황한다.



‘수빈씨 눈빛이...원래 저랬나?’



심지어 살짝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차수빈.



“어제는 제가 신세를 졌네요. 수빈씨.”



묘한 분위기의 차수빈 때문에 잠깐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곧바로 팀장 최고은으로 돌아온 그녀는 차수빈에게 더 이상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록 그녀가 임시직이지만 자신의 팀원이다. 최고은은 차수빈과는 여기서 정확하게 선을 긋기로 한다.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앞으로 그녀에게 팀장으로서 지시를 내리기에도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팀장님. 그냥 다음에 밥 한번 사주세요.”



침대에서 두 손으로 턱을 괴고는 가볍게 미소짓는 차수빈. 마치 이런 일을 자주 있었다는 듯 자신의 집처럼 최고은의 집 침대 위에서 굉장히 편안한 모습이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먼저 출근준비를 할게요.”



“알겠어요. 먼저 씻으세요. 팀장님.”



먼저 씻으라는 차수빈의 말도 묘하게 최고은의 신경을 쓰이게 한다. 뭔가 꺼림칙 하지만 최고은의 사전에 지각이란 있을 수 없는 법. 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서랍장에서 꺼낸 뒤 곧바로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런 최고은의 뒷모습을 침대 위에서 한동안 바라보던 차수빈은



“팀장님 당황했나봐. 저런 모습도 귀엽네.”



활짝 미소를 짓는다. 그 얼굴은 카메라 앞에서 짓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농염한 색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